16일 경기 안산시의 '눈높이 러닝센터'. 파란색 니트에 검은 베레모 차림의 외국인 여성이 여느 한국 아줌마처럼 아이들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품에는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 작은 여자아이를 꼭 안았다. 아이는 한시라도 엄마를 놓칠까 파란 니트를 꼭 부여잡고 그림책을 끄집어댄다.
엄마는 그림책을 들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주기 시작한다. 가끔 띄어 읽기가 틀리고 건너뛰는 음절도 있지만,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2000년 국제결혼중개회사를 통해 한국인 남편을 만나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세 아이의 엄마 발루미 알랄레인(36)씨가 주인공이다.
"남편이 갑자기 펑펑 울었어요, 나를 처음 보고. 왜 그러는지 의아했는데 소개해준 사람 말이 너무 반갑고, 자기를 다 이해해줄 것만 같았다고 했대요." 알랄레인씨가 남편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사랑만으로는 부족했다. "남편만 믿고 무턱대고 한국에 왔다"는 그는 "돈도 없었고, 말도 안 통했고, 아는 사람들이 없으니 밖에 나갈 수가 없어 한동안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한국에 시집왔다가 1,2개월 만에 돌아오는 사람들 심정을 알 것 같았어요. 그래도 남편이 나 없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헤어질 수는 없더군요."
남편 곁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한 이상, 한국사람이 되어야 했다. 해서 이를 악 물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답답하고 우울했는데 그럴수록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요. 드라마, 뉴스, 어린이 만화,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어 실력을 키웠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고, 2년쯤 지나서는 글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삶이 예전보다 수월해진 것은 아니었다. 결혼 첫 해 남재(9)를 얻었고, 이어 미영(7)이와 막내 미숙이(4)까지 알랄레인씨는 어느새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남편이 운전을 해 버는 150만원으로 세 아이를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 영어강사 아르바이트 자리도 알아봤다. 하지만 유능한 강사들 틈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는 곧잘 끊기기 일쑤였고, 세 아이들 키우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다.
남재가 옹알이를 시작하면서 알랄레인씨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아이에게 말을 해주고 싶은데 순간순간 영어로 할지 한국어로 해야 할지 너무 헷갈려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하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의 언어발달이 눈에 띄게 느렸다. 남재는 유난히 말수가 적었고, 둘째 미영이는 엄마의 영향으로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쓰곤 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에 비례해 알랄레인씨의 걱정도 커졌다.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그에게 너무 높은 벽으로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대학을 다녀야 사람답게 산다는 데, 대학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내가 엄만데 무얼 준비해야 되는지 너무 막막했다"며 "필리핀도 학원 많지만, 한국은 학원비가 너무 비싸 엄두가 안 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재가 수학은 참 잘하는데 국어 점수가 안 나오면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하고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어요. 다른 엄마들은 아이들이 점수가 안 나오면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더 마음이 아프죠."
필리핀으로 다 같이 이민을 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밤을 지샌 것도 수백 일이다. 그 때마다 알랄레인씨의 발목을 잡은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국적이다. "내가 다른 나라에 와서 살다 보니 타국살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어요. 누가 뭐래도 아이들은 한국인인데, 아이들이 여기서 튼튼히 뿌리 내리고 살 수 있게 해야지 결심했어요."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교육적인 혜택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알랄레인씨는 경기 안산시에서 운영하는 외국인주민센터의 도움으로 ㈜대교의 다문화가정 지원사업을 알게 됐다.
언어문제로 고통 받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무료로 국어 교육을 지원하고 다양한 문화체험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아이들은 대교 눈높이 러닝센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밝아졌다. 또래들이 학원에 가있는 동안 친구들과 놀 기회가 없어 시무룩했던 아이들이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 활기를 얻은 것이다.
이날 눈높이 러닝센터에서 무료 국어교육을 받은 미영이는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고 친구들도 많아서 너무 좋아요"라고 했다. 알랄레인씨는 "이렇게 좋은 교육 지원이 계속해서 이뤄졌음 좋겠다"고 작은 소망을 건넸다.
세 아이는 그가 한국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그는 "외국인 엄마라서 친구들이 놀리기도 하고, 엄마로서 다 못 해주는 게 많아 속상하다"면서도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섯 식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이 곳이 내 삶의 터전"이라며 밝게 웃었다.
■ ㈜대교 다문화가정 무료 국어 교육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대교(대표 송회용)는 지난해 11월부터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한 무료 국어 교육을 시작했다.
한국 남성과 외국인 여성의 결혼은 2000년 7,300여 건에서 2005년 3만1,000여 건으로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다.
이들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2세도 2007년 기준 5만8,000명에 달하는 등 우리 사회는 이미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지만, 다문화가정과 그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 시스템은 크게 미흡한 게 현실이다.
다문화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대부분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부모와의 의사 소통 및 언어 학습의 부재다. 대교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언어 발달을 돕기 위해 일회성이 아닌 1년 동안 무료로 국어 학습을 시행한 후 향후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갈 방침이다.
이성일 대교 눈높이 안산본부 지점장은 "다문화가정 아이들 50명의 국어 실력을 테스트해본 결과, 대부분 나이보다 1~2년 정도 뒤쳐진 것으로 나타났다"며 "다문화가정은 의사 소통의 문제, 국어 교육의 부재,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이 늘 발생할 수 있어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대교는 지난해 11월 전국의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먼저 초등학생부터 미취학 아동에 대한 학습 지원을 실시하기 위해 총 550여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입회비 및 학습지 비용을 대교로부터 1년간 지원 받는다. 1인 당 매달 들어가는 비용은 3만3,000원. 대교는 올해 10월까지 총 2억2,000만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대교는 이번 다문화가정의 국어 교육 지원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다문화가정 지원사업을 다양하게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강영중 대교문화재단 이사장은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언어문제와 사회적 편견 탓에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다문화가정의 특징을 잘 살려 육성하면 글로벌 시대의 훌륭한 리더로 성장할 수 있다"면서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밝게 자라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교육환경을 제공하는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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