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빚에 허덕이다 파산 면책을 받은 하모(45)씨는 모 호텔에서 월급 130만원의 비정규직 주차관리원으로 일하며 재기의 꿈을 다져왔다. 그런데 최근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를 위해 렌터카를 빌리려다 파산면책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한 뒤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하씨는 "현금을 내겠다는 데도 안되느냐"고 따졌지만, 업체 직원은 "개인신용정보를 조회했더니 파산면책 코드가 떠서 방침상 거래가 불가하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는 "아내와 중3 아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렵게 채무의 고통에서 벗어나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파산면책자들이 색안경을 쓰고 보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다. 빚의 굴레에서는 헤어났지만, '금융 전과자'라는 꼬리표가 달려 은행 거래 등은 여전히 제한을 받는 '반쪽이'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이 같은 차별적 관행이 은행권이나 업계는 물론, 재활을 지원해야 할 정부 기관에서도 횡행하고 있다.
개인파산제도는 과도한 채무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갱생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1997년 도입됐다. 대법원에 따르면 파산면책 건수는 2000년 77건에서 지난해 13만3,995건으로 크게 늘었다.
파산자에 대한 면책은 법원이 빚의 성격, 재산도피 가능성 등을 고려해 판단하는데, 면책이 되면 은행 거래, 공무원 취업 등의 각종 제약도 없어진다. 법적으로 '패자 부활'의 기회를 주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들의 재활을 돕기는커녕 재활 의지마저 꺾는 일이 다반사다. 은행 대출, 취업은 물론 휴대전화 개통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K렌터카 관계자는 "차값이 비싸다 보니 파산면책자의 신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며 "신용정보회사로부터 받은 개인정보에 파산면책 코드가 뜨면 거래를 하지 않는 게 업계의 관행"이라고 말했다.
코드번호 '1201'. 은행연합회와 신용정보회사가 파산면책자에게 부여하는 이 특수코드는 사회적 낙인이나 다름없다. 파산면책자는 과거 신용도나 직장, 자격증 유무 등에 관계없이 이 코드가 부여된다.
일반인의 연체정보 유지 기간이 5년인데 반해 파산면책자 기록은 7년간 유지되고, 금융권은 물론 일반 회사에도 기록이 제공돼 '족쇄'가 되고 있다. 지난해 3월 파산면책을 받은 김모(36ㆍ여)씨는 "정규직 취업도 안되고, 어디를 가도 신용정보 조회 벽에 부딪혀 좌절감만 느낀다"고 말했다.
이 같은 차별에는 정부도 한몫 하고 있다. 파산면책자의 상당수가 영세민으로 분류되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영세민 생업자금대출, 저소득 전세자금대출 등을 신청조차 할 수 없다. 재활과 갱생의 기회를 주자는 제도의 취지를 정부가 앞장 서 훼손하고 있는 셈이다.
보건복지가족부 자립투자지원과 관계자는 "정부 지원을 은행에 위탁해 운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파산면책자도 직불카드는 쓸 수 있는 만큼 이에 따라 신용도를 평가해 7년인 특수정보 기록 보관 기간을 줄이고 광범위한 업계의 차별도 시정할 필요성을 느낀다"면서도 "민간부분의 리스크 관리까지 협의해야 하기 때문에 개선책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외국은 사정이 다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파산면책자들만 상대하는 특수은행이 있어 신용회복의 길을 터주고 있다. 시중은행보다 이자가 높지만 대출도 가능하다. 보통 파산자들은 이러한 특수은행에서 신용을 쌓아 다시 시중은행으로 편입된다.
이상영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파산면책자를 사회적으로 범죄자 수준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 문제"라며 "개인파산의 원인이 경제불황 등 사회 구조적인 데도 있다는 인식 하에 실질적인 지원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이화영 인턴기자(이화여대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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