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다. 죽음이라는 크나큰 이별의 과정을 앞둔 옛 연인들의 대화란 게 고작 옷차림에 대한 품평, 길게 늘어놓는 오랜 친구와의 에피소드 따위다. 희대의 살인사건을 저지른 남자는 자수해 사형수가 되면서 여자를 떠났고 이후 여자는 수녀가 됐다.
그 과정에서 이미 한 번의 이별을 선택했던 두 사람은 남자의 사형 집행을 앞두고 오랜만에 재회했지만, 일견 의미없어 보이는 이야기만 주고 받는다. 물론 두 사람은 이 대화가 엄청난 두려움의 고통을 수반한 채 생산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조직폭력배 두목 공상두와 여의사 채희주의 사랑을 그린 '돌아서서 떠나라'(연출 안경모)는 통속극의 틀 안에 인생을 담은 연극이다. 현실에선 접하기 힘든 건달과 인텔리 여성의 만남이라는 극단적인 설정의 멜로드라마지만 대화를 통해 본 극중 주인공들의 심리 변화만큼은 우리네 평범한 이웃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형을 앞둔 상두의 형무소 면회실에서 시작된 연극은 두 사람이 이별을 택하는 과거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사와 환자로 만난 두 사람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애를 시작하지만 상두는 조직 간 분쟁과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희주를 떠난다.
2년 6개월 만에 희주 앞에 나타난 상두는 자신이 살인사건의 장본인임을 고백하고 자수 결심을 밝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들만의 작은 결혼식을 올리며 이별을 선택한다.
1996년 초연된 이 작품은 이미 영화 '약속'과 TV드라마 '연인'으로 제작돼 대중에 선보였기에 이야기가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2명의 배우가 전체 공연을 책임지는 2인극인 까닭에 배우들의 주고 받는 호흡 속에 대사를 곱씹어볼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특히 극작가 이만희씨의 대사엔 말맛이 살아 있다. "항해하던 배가 난파되어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때 하나뿐인 구명조끼 던져줄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난" 같은 대사 속엔 인생이 들어있었고, "바람 먹고 구름 똥 싸가며 산다, 왜?" 같은 가볍지 않으면서 유머가 살아있는 대사도 좋았다.
상두 역을 맡은 유오성의 단단한 연기와 달리 처음 연극에 도전한 송선미는 발성이 약했지만 풍부한 감정 표현으로 나름의 개성이 담긴 채희주를 만들어 냈다. 채희주 역은 진경과 나눠 맡는다.
"'아름다운 이별'을 표현하고 싶다"던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때문인지 연극은 상두를 향해 "돌아서서 떠나라"며 이별을 고하는 담담한 희주의 대사로 끝을 맺는다.
비장한 결말에 익숙한 우리 관객에게는 다소 낯선 마무리지만 적당히 슬프고 적당히 유머러스한 통속극의 색채를 띠는 '돌아서서 떠나라'는 비루한 현실에 힘겨워하는 이 시대 관객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통속극이 대세로 떠오른 TV드라마의 주시청층이 그렇듯 공연장엔 중ㆍ장년 관객이 유난히 많았다. 3월 8일까지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02)762-9190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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