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150호 익산 미륵사를 세운 주인공이 <삼국유사> 의 기록과는 달리 선화공주(善化公主)가 아니라고 한다. 지난 19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지 현장에서 공개한 국보 11호 미륵사석탑 금제사리장엄구 봉안기에는 무왕 40년(서기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이 무왕의 왕후요, 그녀는 좌평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고 나온다. 사택 씨는 백제 8대 성(姓)의 하나이다. 이로써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 김씨의 자리에 사택씨가 대신 들어앉은 셈이 됐다. 삼국유사>
난세에 피어난 '서동 설화'
무왕의 본명은 부여장(夫餘璋). 어린 시절 마를 캐어 팔아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薯童)이라고 불렀다. 두 모자는 사비성 남쪽, 오늘의 익산인 금마저에서 살았다. 왕손인 서동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신분을 감추고 살게 된 까닭은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대궐을 도망쳐 나와 숨어 살았을지 모른다.
어느 날 서동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그지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꼭 한 번 만나보아야겠다고 작정했다. 궁리를 거듭하던 그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뒤 신라로 건너갔다. 서라벌로 들어간 서동은 대궐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선화공주의 아리따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첫눈에 반한 서동은 그날부터 바랑에 가득 담아서 가지고 간 마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가르쳐주고 부르게 했다. 아이들이 동네방네 다니며 그 노래를 신나게 불러대자 노래는 이내 서라벌 최고의 인기가요가 됐다.
-선화공주님은 / 남몰래 얼려두고 / 맛둥서방님을 / 밤에 몰래 품으러 가네.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之 / 夜矣卯乙抱遺去如) -
이 노래가 바로 <삼국유사> 에 전하는 유명한 향가'서동요'이다. 그렇게 해서 서동은 공주를 유혹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서동요'에는 이처럼 1,400년 전 창검과 화살이 난무하고 피가 피를 부르던 삼국 혈전의 난세에 아름답게 피어난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연이 녹아 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는 서동이 예전에 마를 캐던 곳에서 수많은 금을 꺼내어 선화공주의 친정 신라 왕실에 보냈으며, 이로써 진평왕의 신임과 인심까지 얻어 백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그리고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썼다. 삼국유사>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장엄구 봉안기로 인해 이와 같은 설화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혈전이 그치지 않던 앙숙 관계였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무왕은 서기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까지 재위 42년간 쉴 새 없이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삼국사기>
또 선화공주란 이름은 <삼국유사> 에만 나오고 <삼국사기> 에는 언급이 없다. 최근 햇빛을 본 <화랑세기> 에도 나오지 않는다. 선화공주와 서동왕자의 국제결혼이 사실이라면 백제 관련 기사가 많은 <일본서기> 에도 나올법한데 단 한마디도 없다. 일본서기> 화랑세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졸지에 역사의 미아로
양국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싸우는 판에, 산 같은 황금을 보내고, 장인(匠人)을 보내 미륵사 건축을 도와주었다는 기록도 믿기 어렵다. 결국 미륵사는 무왕과 그의 왕후 사택부인이 창건한 백제왕실의 원찰(願刹)이었던 것이다. 이번 봉안기 공개로 또 다른 사실도 밝혀졌다. 백제 사람들이 자신의 임금을 황제와 동격인'대왕폐하'라고 불렀고, 그의 부인은 왕비가 아니라 '왕후'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서동요'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졸지에 역사의 미아가 되어버린 선화공주는 어디로 가야 하나.
황원갑 소설가ㆍ역사연구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