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열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취임식이 열린 워싱턴에는 16년 전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살을 엘 정도로 추운데다 바람까지 불어 정신을 차리기 힘든 최악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취임식 행사 참석자들은 의사당에서 백악관이 있는 펜실베이니아 애브뉴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특히 흑인이 두드러질 정도로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나왔으니 그들의 감격이 짐작이 간다. 특히 취임식 하루 전이 마틴 루터 킹 데이 였으니 더욱 의미가 깊다.
1960년대 초 학교 구내식당에 처음 들어 갔을 때, 한 구석에 흑인들끼리만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당시 백인들과 같이 앉아 있던 내게는 매우 이상해 보였다. 그런데 이제 흑인 대통령이 나왔으니 미국이야 말로 성공의 기회가 무한정 주어진 자유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바마가 취임식 단 위에 올라서자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온 도시를 흔들었다.
새삼 10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당시 상황이 생각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 합동연설 때는 내가 직접 관여했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알았고, 비교적 잘 해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는 아주 달랐다. 우선 합동연설에 참석할 의원 수가 예상 밖으로 적었다. 숫자를 헤아려 보니 하원의원 435명 중 공화당 의원 20명과 민주당 의원 30명 정도로 모두 합쳐 50명도 안됐다.
그래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각 사무실의 인턴들과 보좌관들로 채우는 안을 내놓았다. 상원도 100 명 의원 중 15명 정도만이 참석할 테고 그 보좌관과 인턴을 합치면 100명 정도, 하원 200명 정도, 그리고 각 상임위원회 보좌관을 합치면 약 350명 내지 400 명 정도였다. 텔레비전으로는 의사당이 꽉 차 보여 그리 창피하진 않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게다가 2층에는 가족과 수행원들이 빈자리를 채울 테니 아래 윗층이 거의 꽉 차는 형태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보일 것으로 생각했다.
열렬한 기립박수와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장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연단에 오른 김 전 대통령은 놀랍게도 영어로 연설을 했다. 역대 외국 대통령이 미 의회 합동연설에서 영어로 연설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스라엘 수상 벤야민 네탄야후는 14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에 와 펜실베이니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해 영어가 모국어처럼 유창하지만 미 의회 연설은 이스라엘어로 했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설을 한 것이다. 미국 의원들과 인턴, 보좌관 등 참석자들은 이미 영어로 쓴 연설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 읽어 내려가면서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연설문 내용은 너무도 멋졌다. 하지만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음이 너무 좋지 않아 연설문 없이 2층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연설 내용을 거의 못 알아들었다는 불평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내 처제도 2층에서 경청했지만 발음이 이상해서 전혀 못 알아들었다고 불평했다. 왜 우리 말로 하지 않고 서투른 영어로 했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연설 내용은 좋았다. 특히 과거 한국 군사정권이 자기를 바다에 던져 죽이려는 순간 미군 헬리콥터가 와서 살려 줬다면서 “미국은 내게 생명의 은인” 이라고 한 대목에서는 본인도 감격에 벅차 잠시 말을 멈추었고 참석자들도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모두가 벌떡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고, 나도 자랑스런 맘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박수에 동참했다. 2층 방청석에서도 그 말은 알아 들었는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의사당이 떠나갈 듯 우렁찬 박수소리는 탄탄한 한미 우호관계를 약속하면서 합동연설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오바마 대통령같이 천지가 진동하는 박수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의사당이 진동하는 열광적인 박수였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연설은 내용이 좋아 박수는 많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때의 감동적인 기립박수는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은 의회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고, 워싱턴 정가는 앞으로의 한미관계를 굉장히 낙관하면서 한국은 역시 미국과 피를 나눈, 아시아의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불행히도 막상 대통령에 취임한 뒤 불과 1년이 채 안돼 한미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햇볕정책으로 불린 대북정책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보내는 식량이 굶주린 주민들에게 가지 않고 군용으로 전용된다는 증거를 확보한 미국 측은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자칫 잘못 대응했다가는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이 나올까 우려해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증거가 있는 만큼 이를 한국 정부에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햇볕정책을 흔들지 말라’ 는 반응만을 얻었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결국 미국이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방해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까봐 더 이상 햇볕정책에 대한 의사 표명을 중단했고,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 최초의 노벨상은 전국민을 감격 속으로 몰아 넣으면서 자랑스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미국의 우리 교포들도 너무도 기뻐했고 자랑스러워 했다. 미국 정부도 축하문을 보냈다.
햇볕정책의 성공 여부는 역사가 판명할 것이지만 미국이 햇볕정책에 공식적으로 반대한 적은 없다. 미 의회 안에서 햇볕정책을 공격하는 의원들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북한에 지원한 식량이 의도와는 달리 북한 군부에 넘어가는 데 우려를 표명했고, 미국과의 긴밀한 협의 없이 거의 일방적인 정책에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햇볕정책이 한미관계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됐던 건 아니다.
그보다는 김대중 대통령이 반미 친북 인사들에 둘러 쌓여 있는 게 한미관계를 야릇하게 만들어 놓았다. 미국에선 특히 ‘우리는 하나다’면서 금세라도 통일이 될 듯 국민들을 들뜨게 만드는 반미 친북 인사들과, 말끝마다 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미 동맹관계가 정말로 심각하게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김대중 정부가 아니라 노무현 정부 때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 내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정서를 타고 당선됐다는 비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미국 대통령 보다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한국 방문을 더욱 갈망하는 이들을 보며, 앞으로의 한미관계를 우려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 틈에 미국에 바짝 붙어 동맹관계를 튼튼히 다졌고, 결국 미국의 도움으로 세계 제 1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하게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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