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대통령 취임식도 이럴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린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대통령 취임식장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4년 혹은 8년 마다 대통령이 바뀌는 순간 어김없이 이곳에서 취임식이 열렸지만 이날은 달랐다.
'최초의 흑인대통령' '실정으로 가득찬 조지 W 부시 정권 종식' 등 전문가와 언론들이 심각하게 제시하는 의미도 이날 취임식의 '남 다름'에 한 몫 했겠지만, 본질적인 것은 의사당 부근 내셔널 몰(국립공원)을 가득 메운 미국민에게서 발산돼 나오는 '진정성'과 '뿌듯함'의 차이였다.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는 자부심, 오바마 대통령이 새 역사를 만드는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4년 뒤 혹은 8년 뒤에는 미국은 전혀 다른 미국이 돼 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런 것들이었다.
그저 새 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취임식장의 의례적인 환호와 박수와는 달리 이날 의사당 주변을 가득 메운 200만명 의 미국인들은 오바마의 취임식을 보며 진정으로 가슴 벅 찬 전율을 체험했다.
날씨는 추웠다. 기온은 영하까지 내려가 조금만 서 있어도 무릎이 시렸다.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교통도 최악이었다.
미국의 숙명처럼 돼버린 테러위협, 거기다가 '흑인대통령'이라는 인종 아킬레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터질까 워싱턴은 취임식 전부터 요새로 변했다.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중무장한 치안요원이 옥상, 하늘, 창문 안, 도로변에서 독수리 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감시했다.
인근 도로는 완전 차단됐다. 새벽 4시, 동트기도 전인 캄캄한 새벽 운행을 시작한 워싱턴행 전철은 첫차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인파로 순식간에 콩나물 시루로 변했다.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전철 구간 중 하나인 오렌지 라인의 종점인 비엔나역에서 40분 정도면 워싱턴 시내에 도착하던 것이 이날은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좁은 객차에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찬 사람들. 플랫폼의 인파 때문에 움직이는 듯 싶으면 멈춰버리는 전철. 그러나 객차 안은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더 이상 태우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스피커에서는 "한 두 사람이라도 더 태울 수 있다면 문을 열겠습니다.'우리는 하나'입니다"는 방송이 나왔다. 전날 링컨 기념관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주제로 열린 콘서트를 비유한 것이다. 웃음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흑인, 백인, 연인, 부부, 가족, 지팡이를 든 노인과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들. 힘겹게 전철역에서 내려 행사장으로 가는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모습의 미국인들은 오전 9시 취임식 식전행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들떠 있었다. 도로에서 '오바마'를 연호하고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오바마가 취임선서를 마치고 44대 미국 대통령에 공식 취임한 순간 내셔널 몰을 가득 메운 미국인들은 서로를 껴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스스로 자축했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쏟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텍사스에서 왔다는 40대쯤으로 보이는 흑인 남성은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있는 것만도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유난히 눈에 많이 띈 흑인들은 이날 만큼은 흑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취임식을 보면서 미국은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연설에서 말한 "창조적이고 신념에 찬 미국인"이 바로 눈 앞에서 수없이 물결치는 것을 보고 이런 국민이라면 미국은 흔들리지 않는 가장 강한 국가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워싱턴=황유석 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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