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 1일. 당시 국민들은 새해 첫날 도하 신문에서 국회 본회의장 점거와 시위 사진을 접해야 했다. 국가보안법 등 이른바 4대 입법을 둘러싼 여야 대치로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한 사진이었다.
당시 김원기 국회의장의 중재로 2004년을 불과 2시간 남겨두고 극적으로 합의가 이뤄져 극한 충돌은 면했지만 국민들은 새해 벽두를 불쾌한 소식으로 맞아야 했다.
2009년 1월 1일에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게 됐다. 새해 벽두가 여야 대치로 시작되는 것이다.
정치권이 연말 연초 파행과 대치, 충돌을 밥 먹듯이 되풀이하는데 대한 비난이 높다. 국회가 새해 벽두 희망찬 소식으로 국민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지는 못할망정 새해 첫날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짜증을 더하게 하는 데 대한 엄중한 질타가 많은 것이다. 특히 이런 악습이 만성화한 데 대한 우려가 크다. 강제적 규제책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밑 국회 파행과 충돌의 역사는 굵직한 것만 해도 여러 건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1958년부터 있었다. 그 해 12월 24일 집권 자유당은 강력한 언론제한을 골자로 하는 신국가보안법을 경호권까지 발동해 야당 의원을 감금해 놓은 채 강행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연말 연초 민심이 급격히 이반했고, 길게는 60년 4ㆍ19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최근의 사례도 많다. 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은 복수노조 허용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안 등 20여개 법안을 단독 처리했다. '노동법 날치기 사태'로 불리는 이때의 단독 처리로 야당의 저항은 물론, 노동계의 총파업 등 국민적 반발이 일었다. 국민들은 어수선하게 연말 연초를 보내야 했다. 이 사건은 김영삼 정권이 레임덕에 들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노동법도 결국 97년 재개정됐다.
99년 연초에는 당시 집권 2년차 여당인 국민회의가 강행처리를 했다. 1월 5~7일 3일 간 국민회의는 한일어업협정 비준동의안을 비롯, 경제위기 국정조사안, 교원노조법 개정안 등 130여건의 안건을 야당 없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이 때문에 연초 정국이 급랭하면서 국민들은 피곤한 새해 벽두를 보내야 했다.
2004년 연말은 2008년 연말과 매우 흡사하게 격렬했다. 그 해 총선에서 과반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4대 입법을 강력히 밀어붙이며 법사위에서 한차례 몸싸움을 했고, 급기야 한나라당의 본회의장 점거 상황까지 벌어졌다.
12월 31일 밤까지도 대치하다 겨우 합의해 파국은 면했지만 여야의 볼썽사나운 싸움은 새해 첫날부터 정치혐오증을 증대시켰다. 이 때부터 민심은 우리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2005년 12월 9일에는 우리당이 한나라당과의 본회의장 몸싸움 끝에 사학법 개정안을 강행 통과시켜 2006년 새해를 얼어붙게 했다. 한나라당은 당시 한 달 이상 장외투쟁을 이어갔고, 사학재단 등 종교계도 거세게 반발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한국 국회가 선진국 국회처럼 '생산적 불문율'이 정착될 때까지는 국회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의원들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국회 파행 기간에 따라 정당의 국고보조금을 깎는 등의 제도로 강제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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