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더 일하고 덜 벌어도, 즐거우니까 괜찮아요."
삼성전기 개발팀의 막내 한선용(19)씨는 지난해 9월부터 평일 중 하루도 야근을 거른 적이 없다. 하루에 15~19시간씩 일하고, 휴일도 반납하기 일쑤다. 쏟아지는 일감에 비해 늘 사람이 부족한 탓이지만, 그 스스로 야근을 자청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고졸 사원인지라, 월급은 많지 않다. 기본급 80만~90만원에 매일같이 야근을 해 받는 수당을 합쳐도 같은 일 하는 대졸 사원들과는 차이가 크다. 그래도 그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일은 고되지만 회사 지원 받아 하고 싶은 실험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돈이요? 고등학생 때까진 하루에 1만원만 있어도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는데요, 뭘."
한씨는 구미전자공고 졸업반이던 2007년 세계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 '모바일 로보틱스' 분야 동메달을 땄다. 모바일 로봇의 기계시스템을 조립, 설치하고 제어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종목이다.
그 덕에 그 해 11월 삼성전기에 입사, 휴대폰 카메라 등을 제작하는 개발팀에 배치됐다. 석ㆍ박사 출신이 즐비한 개발팀에서, 그는 최근 몇 년 간 입사한 사원 중 유일한 고졸이다.
전문지식은 '가방 끈' 길이에 밀릴 지 몰라도, 회로 등에 대한 실용 감각은 뛰어나 종종 '조언'을 요청 받는다. 물리학 등 좋아하는 분야 책을 사는 데는 수 십 만원도 아깝지 않게 쓰고, 프로그래밍에 몰두하면 16시간 동안 꼼짝 않을 만큼 집요하게 매달린 결과다.
대개의 과학 전공자들이 그렇듯이, 한씨 역시 어린 시절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그가 초등학생 때 어머니와 헤어지고 공사판을 떠도는 아버지에겐 과학도구 하나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정부에서 저소득 가정에 지원하는 2,200원짜리 식권을 친구들에게 팔아 용돈을 마련하고, 자신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런 형편에서 한씨가 어렵게 과학적 재능을 키워갈 수 있었던 건 '호기심 소년'이 딱한 처지를 헤아려 인두나 전선 따위를 사줬던 아파트 경비아저씨 덕이다. "그 전선으로 빨강, 초록, 노랑색 불이 켜지는 직렬 회로를 만들었을 때 느낀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해요." 나머지 8할을 채운 것은 오롯이 그의 노력이었다.
사촌형 따라 갔던 공부방에서 몰래 집어온 성인용 과학백과사전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고, 중학생 때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C언어를 독학했고, 각종 과학경진대회에서 상도 여럿 탔다.
한씨는 고교 시절 세계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정부 지원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첫 도전한 '컴퓨터 제어' 분야에선 전국대회에서 고배를 마셨고, 새로 생긴 '모바일 로보틱스' 분야에서 금메달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으나 본 대회에서는 아쉽게도 동메달에 그쳐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불우한 가족사도 이어졌다. 이혼 후 따로 살던 어머니는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자신의 생일 날 "맛있는 것 사줄까"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네온 어머니의 전화를 성의 없이 끊어버린 며칠 뒤였다. 신용불량자가 된 아버지는 아들을 보살피기는커녕 때때로 그에게 용돈을 받아간다.
이제 겨우 열 아홉, 피가 펄펄 끓는 나이에 감당하기엔 버거웠을 테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실패를 좌절의 핑계로 삼지 않았다.
2009년 새해에 한씨는 그토록 바라던 대학에 진학한다. 경희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다. 전공이 다소 의외라 고개를 갸웃하자, 이렇게 답한다. "과학은 혼자 공부해도 돼요. 경영학까지 복수 전공해서 이공계 학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사람 심리를 공부하면서 조직을 유연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씨는 "책이 너무 보고 싶어서 인근 대학 도서관 출입증도 만들었는데 바빠서 가지 못했다"며 "대학생으로 맞는 올 한해는 전문서적을 실컷 읽을 생각이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합가'도 계획하고 있다. 어린 자식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던 아버지인데, 밉지 않을까.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걸요. 작아진 몸집을 보면 미안해져요. 대출 받아 얻은 전셋집이지만, 올해에는 꼭 모시고 살 거예요."
새해맞이 계획에 회사 일에 대한 욕심이 빠질 수 없다. "지금까지는 주로 옆에서 돕는 일을 했는데, 올해는 작은 프로젝트라도 책임자가 돼 일하고 싶어요. 선배들 말씀이 한가지 일을 끝까지 해내면 다음부턴 아무리 큰 일도 잘 할 수 있다고 해요."
한씨에게는 평생에 걸쳐 이루고픈 또 다른 꿈이 있다. 훌륭한 물리학 교육 기자재를 개발, 싼 값에 보급하는 것이다. 재능이 있는데도 가난해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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