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건설 자재를 주로 생산하는 J사 K총무부장은 요즘 부도난 회사로 출근하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철썩 같이 믿고 대기업으로부터 받았던 어음 결제기간이 차일 피일 미뤄지더니, 이마저도 설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K부장은 "당장 회사 운영 자금은 물론이고, 이번 설에는 직원들에게 밀려 있던 월급을 주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틀렸다"고 발만 동동 굴렀다.
#2인천 서부산업단지내 주물 생산 K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P사장은 "여전히 은행 문턱이 높은 상황에서 대기업마저 어음을 돌려대면 우리 같은 중소 업체들이 자금을 융통할 곳은 아무데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중소 기업들이 어음 때문에 아우성이다. 특히 현금 확충에 나선 대기업들이 어음 결제 비중을 높이고 결제기일을 늦추는 바람에 중소 기업들의 자금난은 극에 달하고 있다. 정부가 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재계에 '대기업의 어음결제를 자제해 달라'고 공식 요청키로 한 배경이다.
업계는 사실 벼랑 끝 중소기업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시급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2,3차 중소 협력 업체들에게까지 원활하게 유동성이 흘러갈 수 있는 실질적인 시스템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다급한 분위기는 이날 경기도 파주의 중소기업 현장에서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주재로 열린 실물경제 지원기관 협의회에 참석한 중기 대표들의 입을 통해 여과없이 반영됐다. "여전한 대기업의 횡포와 유동성의 부족 등으로 경영난이 심각하다"는 한목소리들이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대기업에 주문자 상표 부착방식(OEM)으로 제품을 납품하고 있으나 원자재가 급등에도 불구하고 납품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이로 인해 신용보증을 얻는데도 어려움이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중소기업 대표도 "은행의 문턱이 너무 높고 비가 올 때 우산을 주지 않는다"며 "담보비율도 과거 경기가 좋을 때는 90%까지 주던 것을 지금은 60∼65%밖에 주지 않아 돈을 활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금융기관에 불만을 토로했다. 중기 대표들은 또 환 헤지로 인한 어려움과 외화차입금의 만기연장 등 중소기업이 직면한 다양한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기의 가장 큰 현안중 하나인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어음결제 자제 촉구가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대기업들마저 현금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서열 10위권인 A그룹 관계자는 "올해 첫 임원 전략회의에서 경영 최우선 순위를 이익 극대에서 현금 확보로 수정했다"며 "한달 전만 해도 2조원이 넘었던 유보 자금이 지난해말 금융권의 대출 상환 압박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에, 협력 업체들에 대한 어음 결제 비중이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연구원 이창민 책임연구원은 "금융권과 대기업들에서 자금이 흘러나오지 않고선 현재 중소 기업들이 처한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기는 힘들다"며 "한계 상황에 다다르고 있는 중소 기업들을 되살리기 위해선 관계 당국의 보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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