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지방의 한 고교를 졸업한 A(43)씨. 택시기사인 고졸 아버지를 둔 그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판사가 됐다. A씨의 고교 후배이자 한 중소기업 오너 아들인 B(32)씨는 저조한 성적 때문에 지방의 한 사립대에 입학했으나,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경영학 석사학위를 딴 뒤 귀국해 후계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최근 이들이 다녔던 고교 송년회 자리에서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80년대 학번은 개천에서 용이 난 ‘신화’가 적지 않은데, 90년대 학번들은 있는 집 자녀들이 잘 나간다”는게 결론이었다.
이런 사례를 수치로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 사회에서 신분 세습구조가 갈수록 고착화하고 있으며, 후천적 성취 지위인 학력보다는 가정배경에 의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정되는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여유진 부연구위원은 4일 ‘한국에서의 교육을 통한 사회이동 경향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서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본인이 성취한 학력보다는 아버지의 사회경제적 지위(SES, Socio-Economic Status)에 의해 소득 수준 등이 결정되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여 위원이 20~59세 남성 가구주 3,557명을 대상으로 소득에 미치는 영향력을 수치화한 결과, 40대의 경우 아버지 SES 0.2, 본인 교육수준 0.391로 나타난 반면 20~30대는 아버지 SES 0.25, 본인 교육수준 0.299 였다. 40대는 본인 학력이 아버지 SES에 비해 2배 가까이 소득에 영향을 줬지만, 20~30대는 거꾸로 아버지의 ‘후광’이 더 큰 힘을 발휘했다는 의미다. 여 위원은 “80년대는 소득 수준 결정에 개인의 능력이 중시됐으나, 90년대를 지날수록 가정배경이라는 후천적 요소가 좌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버지 SES가 자녀 학력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매우 컸다. 영향력 지수가 평균 0.497이었다. 40대가 0.478로 가장 높았고, 50대 0.47, 20~30대 0.433으로 각각 나타났다. 아버지가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면 자녀 역시 높은 교육수준을 획득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실제 최상위 10%와 최하위 10% 계층의 교육비 지출액 격차는 무려 6배나 날 정도로 상위 계층일수록 교육 투자를 통한 신분 재생산 경향은 뚜렷해지는 양상이다.
여 위원은 “개인의 교육적 성취보다 가정환경이라는 선천적 요인에 의해 사회경제적 지위나 소득수준이 결정된다면 사회적 효율을 감소시키고 사회 통합도 저해하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재용 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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