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에 구애 받지 않아도 돼 정년을 맞는 기분이 홀가분하지만 학교를 떠나서도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대한제국의 역사를 통해 한국의 정통성을 찾는 연구에 매진하면서,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의 불법성을 강조한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 (李泰鎭ㆍ66)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교수가 다음달 강단을 떠난다.
1977년 서울대 첫 강의 이후 그는 32년간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몸을 바쳤다. 역사학회회장,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도 역임했다. <한국병합의 불법성 연구> (2003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2005년) 등은 우리 역사의 재조명에 앞장선 그의 대표적 저서와 논문이다. 동경대생들에게> 한국병합의>
특히 이 교수는 한일병합은 성립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병합의 불법성 연구 및 프랑스 정부에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펼치는 데 있어 그는"운이 좋았다"고 겸손해 했다.
시작은 규장각관리실장을 맡게 된 1988년부터다. 그는 "30여만권의 규장각 도서는 당시 민족최대 유산이었지만 국민의 관심이 없어 이를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예산 증액을 위해 규장각에 대한 소개 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로 건너간 사실을 알게 됐다.
병인양요 후 프랑스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자국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던 것. 편지에는 "350여 권의 책을 제외하고 모두 불태우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 교수는 "국제법 학자에게 자문한 뒤 서울대 총장 명의로 반환 요구를 시작했고, 외교부 차관이 요청하는 수순을 밟았다"고 말했다.
한국병합의 부당성을 발견한 것도 규장각에서다. 규장각 서적의 편찬 사업을 위해 조선 후기 법령, 칙령 등을 우선적으로 정리하다가 일본 측의 위조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교수는 "위조 서류가 80여건에 달해 다른 중요 문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며 "을사늑약을 보니 조약에 제목도 없고 고종의 비준도 없어 문제제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1년 이후 한일강제합방의 불법성을 일본 학자들과 함께 연구한 성과가 최근 일본에서 <한일병합과 현대> 로 출간됐고, 올해 3월 같은 제목의 한국어판이 출간될 예정이다. 한일병합과>
그는 대학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지난해까지 2년간 서울대 인문대학장을 맡으면서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1975년 서울대 문리대가 해체돼 인문·사회·자연대로 분리된 이후 30여년 만에 인문대 차원의 총동창회를 결성했고, 국내 최고경영자(CEO)와 사회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AFP)도 개설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개발위주로 수십 년을 달려오느라 지도층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고 그 폐해는 컸다"며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은 모험이었지만 '자신의 길을 인문학에서 찾았다'는 CEO들의 반응에서 볼 수 있듯 성과가 있었다"고 흡족해 했다.
퇴임 후 계획에 대해서 이 교수는 지난해 특강을 통해 운을 뗀'외계 충격설'을 보다 구체화 시키겠다고 밝혔다. 운석의 충돌 등 외계(外界)의 충격이 역사적 시기마다 큰 변환을 몰고 왔다는 점을 입증하겠다는 것이다.
과거 1400년대 후반부터 170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 실록에 기재된 유성에 관한 기록은 3,300여 건이고 그 기간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조선 왕조의 비상대책이 시행됐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왜란ㆍ호란 후의 대동법이었고 이 같은 것들이 새로운 사회 체제를 형성토록 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칼 마르크스는 계급모순에 의한 계급투쟁을 사회변동의 원인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19세기 관점으로 인류 전체 역사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사회 변동은 외계 충격에 의해 일어난 고난 속에서 이를 이겨내려는 구제 조치가 사회의 틀로 만들어지고 형성되면서 촉발된다는 관점으로 역사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역사교과서 논란 등 역사를 둘러싼 대립에 대해서는 "고도 성장의 그늘 아래 학문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경향이 강해 일어난 대립"이라며 "좌파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벗어나 남북체제를 비교함으로써 역사학자도 감당못할 내용을 강조하고 있고, 뉴라이트 등 우파는 임시정부의 전통을 부정하는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후학이 가야 할 길을 묻자 이 교수는 "인터넷 등 편리한 수단에만 의존하면 편의주의에 빠져 진짜를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며 "힘들고 어려운 일을 정면대결 하되, '주마(走馬)보다 우보(牛步)'라는 말이 있듯 빨리 달리는 말을 타기 보다는 느리게 걷는 소의 등에서 주위를 음미할 것"을 주문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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