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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2> 작곡가 이봉조의 넘치는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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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2> 작곡가 이봉조의 넘치는 끼

입력
2009.01.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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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조 라는 분이 누군데 실시간 검색에 이름이 떴나요?"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고 나는 매우 씁쓸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도 벌써 22년째나 되니까 잊혀지는 모양인가? 그러나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큰 별이었던 사람이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까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이봉조는 타고난 엔터테이너다. 활동하던 시기는 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연예활동을 했다. 한양공대 건축과를 나와 건축기사 생활을 하다가 악기를 배우게 된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를 잘 쓰는 등 재주가 많았다. 서울의 인사동에서 한정식 식당을 경영하던 그의 누님도 그림을 아주 잘 그려서 한때는 전 국무총리 김종필씨가 주관하는 일요화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듯 예술적 감각이 집안 내력인 듯 하다.

연예계에서 이봉조의 글씨는 유명하다. 정초만 되면 꽤나 큰 크기로 붓글씨 연하장을 수 십 장씩 써서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는데 글씨가 워낙 좋아 표구해서 벽에 걸어놓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한테도 여러 장을 보내와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타고난 로비스트이기도 하다. 정부의 고위층, 정치계, 문화계, 경제계, 법조계, 군과 경찰 등에 인맥이 있어서 동료나 후배가 무슨 어려움을 겪을 때 해결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가 현미를 만난 것은 미군 쇼 무대에서다. 1957년 김명선이라는 본명을 가진 가수 현미가 미군부대 쇼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때 이봉조가 그녀를 만나 가수의 길을 인도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부부의 인연으로 발전하게 된다.

6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미군 쇼에서 활약하던 가수 연주자들이 일반무대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봉조와 현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봉조는 악단을 만들어 악단장을 하면서 작곡가로 데뷔를 하는데 이들 둘이서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 '밤안개'라는 노래다. 1962년이다.

노래가 나가자마자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레코드가 많이 팔려 나갔고, 두 사람의 인기가 치솟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노래가 이봉조 작곡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노래는 이봉조 작곡이 아니고 미국의 에디 히긴스(Eddie Higgins) 쿼텟이 연주한 'It's a Lonesome Old Town'이라는 음악이었던 것이다.

이봉조 역시 테너 색소폰 연주자라서 느낌이 좋은 그 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현미에게 부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봉조가 "작곡이 아닌 편곡이었다"라고 해명하면서 곧 정리가 되었다.

그는 현미에게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등 많은 노래를 작곡해 주면서 두 파트너의 활동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작곡가로서의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그는 연주가의 생활에도 매우 큰 비중을 두었다.

서울의 일류 나이트클럽 주인들이 그를 스카우트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이봉조 밴드가 연주를 하면 이른바 굵직굵직한 손님들이 물밀듯이 오기 때문이었다. 소공동, 지금의 한진빌딩에 있던 국제호텔 2층의 '블루룸'이라든가, 회현동에 있던 '유엔센터' 등이 그가 출연했던 곳이다.

그는 호주가였다.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다. 매일 독한 술을 즐겼는데 이것이 항상 현미의 불만이었다. 훗날 강남의 압구정동에 자신이 운영하는 클럽을 차렸다. 지하에 있는 이 클럽에는 손님들이 매일 가득했지만 경영은 순조롭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 약한 그의 경영방식 때문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마음 약한 면은 그의 큰 결점이기도 했다.

1967년 어느 날 그는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꼭 보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장소는 서울의 서소문동 배재학교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불고기 집이었다. 온돌방에 놓여있는 식탁 앞에 어떤 예쁘게 생긴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는데 한 눈에 '윤복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때까지 윤복희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윤부길)가 운영하는 쇼 단에서 노래를 불렀고 극장무대에서 나는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낯이 익었다. 그녀는 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해서 국내에 정착할 것이라고 했다. 데뷔곡으로 이봉조씨는 '웃는 얼굴 다정해도'를 만들어 윤복희에게 주었다. 이른바 미니스커트 선풍을 일으킨 주인공의 첫 걸음인 것이다.

같은 해 이봉조는 또 한명의 가수 지망생을 나한테 소개 시켰다. 정훈희였다. 이번엔 역시 서소문에 있는 TBC-TV의 스튜디오에서다. 얼굴이 예쁘게 생겼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매력이었다.

너무 어려 보여서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16살이라고 했다. "정형이 얘 노래를 들어 보고 앞으로 클 수 있을지 없을지 솔직하게 얘기 해주소." 이봉조씨의 말이다. 한편으로는 쑥스럽고, 한편으로는 으쓱해지는 마음도 있?해서 노래를 들었더니 아주 깨끗한 음색으로 싱그러운 맛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였다.

내 생각으로는 대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평을 했다. "그렇지. 그렇지. 내가 잘 뽑았지!"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봉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물론 정훈희는 '안개'라는 노래로 데뷔해서 대성했다.

이봉조는 일에 만족해서 안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했다. 실 오스틴이 연주한 '대니 보이'를 자기 버전으로 국내에 보급 시킨다든지, 우리나라 음악을 해외에 알리고 수출해야 한다고 역설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가요제에 최초로 참가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그가 나와 함께 참가한 '그리스 국제가요제'는 매우 의미 있는 일로 기억될 것이다.

최근에 보면 국민가수니, 국민배우니, 심지어 국민여동생이라는 호칭까지 붙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봉조야 말로 국민작곡가로 불리 울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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