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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3> "外畵수입 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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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3> "外畵수입 큰돈"…

입력
2009.01.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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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벼락이다. 잡아라.” 외국영화 수입으로 ‘떼돈’을 버는 케이스가 늘어나자 국내 굴지의 재벌들과 세계 영화계의 지배자인 미국이 한국 영화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먼저 재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출사표를 내밀었다. 미국도 직배로 한국 시장을 휘어잡겠다며 무역대표부를 앞세워 한국정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극장업자들은 극장업자들대로 미국 영화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영화인들은 미국영화 직배 반대 시위로 경찰과 충돌하며 영화제작을 중단하고 거리로 나섰다. 198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에 대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의 복합영화관이 처음 세워진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롯데가 첫발을 디뎠다. 1989년, 서울 잠실 롯데월드가 생기며 복합영화관이 들어 선 것이다. 삼성, 대우, SK, 현대, LG가 사업단을 꾸렸다. 그들은 세계영화제와 시장을 휩쓸며 수천만 달러씩 뿌려대기 시작했다. 세계영화시장에 봉이 나타난 것이었다.

순식간에 한국판권이 5배, 10배로 뛰기 시작했다. 세계 영화시장을 무대로 재벌들끼리의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졌다. 한편, 국내에는 극장 인수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명보극장, 씨네하우스, 스카라 극장이 그들 손으로 넘어갔다. 서울 압구정동에 복합영화관 ‘씨네플러스’가 세워지며 전국의 극장이 복합영화관으로 개조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 비디오 시장도 무한 팽창했다.

한국 영화 의무편수를 상영하지 않으면 외화를 상영할 수 없다는 스크린쿼터에 묶인 극장에서도 대란이 일어났다. 재벌들은 수입한 영화를 배급하기 위하여 한국영화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재벌들이 영화 제작업에 뛰어들자 출연료, 스탭 인건비, 기재대여료가 순식간에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최고급 영화기자재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학마다 영화과가 신설되고 입학 전쟁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돈벼락 맞는 직업이 된 것이다. 약 5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의 변화였다. 그러나 어쨌든 이 모든 것은 기형적이었다.

마침내 재벌들 사이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창고에 필름이 쌓이는 속도가 예상보다 컸던 것이었다. 단 몇 년만에 수천억씩 재정 손실이 났다. 그들은 들어올 때도 빨랐지만 나갈 때도 빠르게 보따리를 쌌다. 창고에 쌓인 필름과 비디오를 휴지조각같이 버리고 영화사무실을 닫기 시작했다.

극장들을 되팔기 시작했다. 팔리지 않으면 비워두고 그냥 떠났다. 그 중 삼성은 마지막 제작한 <쉬리> 한편이 성공하여 체면 유지를 하고 떠났다. 1조원 이상을 뿌리며 귀신같이 나타났다가 귀신같이 사라진 재벌들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국영화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낮에는 골프채를 들고 필드를 누비고, 밤에는 룸 살롱에서 술에 취해 살던 사람들의 커진 간에 경화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선도 그룹들이 ‘난리를 치고 떠난 자리’에 다른 재벌들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먼저의 재벌들이 ‘돈이다. 무조건 잡아라.’ 였다면 그들은 접근하는 방법부터 달랐다. 선도 재벌들이 실패한 요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와 문화를 기존 사업에 접목시켜 회사를 리모델링하는 새로운 안목까지 갖추고 있었다.

기수로 나선 것이 ‘제일제당’이었다. 오너인 ‘이미경 이사’가 사업주체에 서 있었다. 그는 외국영화 판권을 구입하여 국내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단선의 유통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미국의 메이저급 제작사인 ‘드림웍스’ 설립에 3억달러의 지분 투자를 하고 한국 판권과 일정수익지분을 받았다.

홍콩의 ‘골든하베스트’와 호주의 ‘빌리지로드쇼’와 합자하여 ‘CGV’ 200개 스크린을 전국에 세우기로 하고 극장사업에 진출하였다. 공급과 유통의 문제를 해결한 후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스크린 쿼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종학 TV피디를 영입하여 영화제작회사‘제이콤’을 설립하였다.

그룹명을 ‘제일제당그룹’에서 ‘CJ그룹’으로 바꾸었다. 식품전문기업 이미지를 다기업 문화그룹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1996년,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종학PD가 주도하는 ‘제이콤’과 외국영화수입을 전담하는‘하명중영화제작소’가 전략적으로 제휴, ‘CJ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전세계 영화계에 공포했다.

곧 이어 동양그룹이 ‘대우’의 영상사업을 인수하며 뛰어 들었다. ‘메가박스’ 극장 체인과 배급사 ‘쇼박스’, 케이블 영화전용채널 ‘OCN’, 'CATCH ON'을 운영하며 극장과 방송 사업에 영역을 넓혀갔다. 롯데그룹도 전국 롯데백화점에 극장을 세우기 시작하며 뛰어들었다.

10년 전 대기업들이 영화계에 진입하던 때와는 경우와 목적과 방법이 달랐다. 3대 그룹은 한국영화 제작투자에도 열정적으로 나섰다. 한국영화의 파이가 커졌다. 젊고 우수한 인재들이 꿈을 갖고 영화계로, 영화계로 달려왔다. 새로운 기획과 제작으로 극장에 관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세계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우뚝 서기 시작했다. 정부의 지원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곧 불거져나왔다. 영화와 뉴미디어시장이 커지면서 제작원가가 걷잡을 수 없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투자대비 수익에는 한도가 있는 한국 시장이었다. 투자하는 족족 실패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투자조합이, 영화제작사와 배급사가 도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동양미디어도 적자를 이기지 못해 극장사업을 외국회사에 매각해 버렸다. CJ마저도 인터넷사업을 타 그룹에 매각하였다는 언론보도가 이어졌다. 이어 관계된 미디어사업 매각설까지 나와 영화계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아니, 영화계 모두가 떨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루머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계 모두가 믿으려 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 대기업들이 귀신같이 나타났다가 귀신같이 사라져 영화계가 초토화 되었을 때, 지금의 한국영화가 있도록 한 주역이 누구인지를 우리 사회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CJ는 한국영화산업을 세계화하는데 가장 선두에서 뛰었다. 영화관을 현대화하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한국의 CGV를 세웠다. 수많은 외국과의 합작영화를 제작하였고, 수많은 트로피를 세계영화제로부터 수여 받았다.

1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 CJ가 한국영화계에 이룬 업적은 너무나도 크다. 현재 한국영화산업은 살얼음판에 올라선 듯 위태롭다. 전국극장과 배급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회사가 한 순간에 짐을 싼다면 한국영화계는 대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는 문화의 시대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위하여 뛰어든 기업들과 영화인이 뜨겁게 손을 맞잡고 한 해를 달려주길 바란다. 우리 모두 행복과 기쁨을 선사하는 희망 찬 한국영화계의 새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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