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자부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는 B사 P사장. "그동안 현금으로 물품대금을 주던 거래 대기업이 지난해말부터 한달이내 결제기일의 어음을 주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두달짜리로 바꿨어요. 가뜩이나 현금을 마련하지 못해 하루하루 살얼음인데 두달이나 물품대금을 못주겠다고 하니 앞이 캄캄합니다. 은행에 가서 할인이라도 받으려고 하니 할인율이 높은 것은 물론이고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서를 갖고 오라는 거예요. 보증서 받기도 물론 쉽지 않구요. 이래서야 기업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기업 살리기에 비상대책까지 강구하고 있다는 정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돈가뭄에 시달리는 중소기업들의 원성이 높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분위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고용의 80%이상을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이 극심한 자금난에 근로자들을 길거리로 내 몰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정부가 그토록 외쳐대는 금융권의 적극적인 대출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은행들이 '몸 사리기'(?)에 급급해 웬만한 중소기업이라도 은행권 문턱을 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정부의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책에 대한 신뢰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수시로 돌변하는 은행권의 행태에 중소 기업들의 반감만 쌓여 가고 있다.
반월ㆍ시화공단내 S염색 공장에서 30여년을 일해 온 K이사는 "경기가 좋을 때는 먼저 연락도 해오고,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대출을 유도하더니 경기가 어려워지니까 이젠 대출 관련 담당자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며 "수조원씩 풀어 중소기업 살리겠다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 정부측의 요란한 선전을 보고 듣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 하다"고 몸서리를 쳤다.
중소기업에 대한 은행권의 대출은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은행들이 중소 기업들의 신용위험지수를 극도로 높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은행이 내놓은 '금융기관 대출행태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중소기업 신용위험지수 전망치는 59로, 관련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1999년 1분기 이후 가장 높았다. '중소기업의 신용도가 더욱 나빠졌으니 대출에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는 은행들의 판단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대기업들도 전체적으로 어려워지자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다. 말로는 '상생 협력'을 외치지만 중소 기업들의 자금 줄을 옥죄고 있다.
"아무렴, 대기업 사정이 우리 중소 기업들 보다 더 나쁘겠습니까? 자기들 먼저 살겠다고 판매 대금을 어음으로 끊어 주고 있어요. 지금 이 판국에 어음을 끊어주면 우리한테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대기업들이 '상생'을 한다고요? 다 말뿐입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자동차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S전자 K전무는 안타까워했다.
중소 기업들은 조업일수와 가동률을 줄이면서 버텨보고 있지만 이마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경기 상황이 이른 시일 내에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는데다, 곧 닥쳐올 것으로 예상되는 줄도산에 따른 실직 대란 공포가 중소 기업계 전체를 휘감고 있는 형국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으로 대다수 우량 중소 기업들의 도산을 막기 위해서는 은행을 중심으로 한 일선 창구에서의 금융권 지원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 제언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금융위기에 따른 중소 기업들의 피해가 날이 갈수록 커가고 있는 것에 대해 현장으로 옮겨지지 않는 당국의 잇단 정책을 주된 이유로 꼽고 있다. 오히려 체감지수가 떨어지는 정책들을 남발하면서 정부에 대한 신뢰도만 훼손되는 '빈말 대책'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중소기업을 위한 많은 대책들을 쏟아냈지만 아직까지 지원정책을 피부로 느끼는 중소 기업은 거의 없다. 중소기업연구원 이창민 책임연구원은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까지 발표된 정부 정책들이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신속한 후속 조치를 취하고 보완하는 것"이라며 "이젠 현장 맞춤형 정책을 실행할 때"라고 강조했다.
현장으로 전달되지 않는 정부의 정책은 중소기업중앙회의 최근 조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중앙회가 234개 중소 업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부의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이행상황 긴급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70%는 아직까지도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답해, 관계 당국의 지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장 체감도는 크게 떨어졌다.
적지 않은 부실을 떠 안고 있는 국내 중소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옥석'(玉石)이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금융권의 지원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무리라?것이다. 생존이 불확실한 중소 기업에게 은행 대출을 무작정 강요할 수 만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박사는 "이번 금융위기를 넘으려면, 아프겠지만 국내 중소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먼저 시행돼야 한다"며 "그 다음, 우량 중소 기업에 대한 재정 지원과 내수 부문 활성화 등을 통한 경제의 선순환 시스템 구축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상생 협력의 새로운 패러다임 정착이 필요합니다."
중소기업중앙회 김기문(56) 회장은 글로벌 경제위기로 휘청거리는 국내 산업계에 이 같은 처방전을 제시했다. 올해에도 글로벌 경기 둔화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내 대ㆍ중소 기업이 모두 살아 남기 위해선 특단의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시계 업체 '로만손'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 회장은 2007년 3월에 중소기업중앙회 23대 회장에 올랐다.
그는 특히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중소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대기업들에겐 보다 실질적이고 의미 있는 상생 협력 수단 마련을 촉구했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대부분의 대ㆍ중소기업간 상생 협력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경영 상황이 괜찮은 1차 협력사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곳은 2,3차 협력사들이거든요. 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상생 협력 프로그램의 물줄기가 흘러나갈 수 있도록 힘을 써줘야 합니다."
김 회장은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ㆍ중소 기업간 상생 협력이 이뤄지기 위해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중소 기업들은 도태돼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대다수의 국내 중소 기업들이 겪고 있는 경영난이 외부 환경인 '미국발 금융위기'로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국내 중소 기업들의 자체 결함 또한 적지 않다는 분석에서다.
"사실 소상공인을 포함해 국내 중소 업체들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많아요. '버티다 안되면, 식당이나 해보지 뭐'라는 식으로 문을 연 주변 가게들도 많거든요. 식당도 엄청난 노하우와 경쟁력이 필요한 곳 아닙니까?
이렇게 생겨난 중소 기업들도 많아요.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안됩니다." 내상(內傷)을 도려내지 않고선 위기 뒤에 찾아올 기회조차 잡을 수도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번 금융위기로 국내 중소 기업들이 무더기 도산 직전에 내몰린 데는 관계 당국의 신속하지 못했던 위기 대응책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내놓았다.
그는 정부의 전반적인 금융위기 대책이 적절했다고 평가하면서도 "'키코' 가입 중소 기업들의 피해가 악화될 때까지 별 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해서 피해를 키웠다"며 "실행력을 담보하지 못한 정책들을 계속해서 내놓는 바람에 정부 정책의 신뢰감이 떨어진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가 실물 경제로 옮겨 붙는 과정에서 미세 정책 집행의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정부에 대한 불신감만 높이고 중소 기업들의 피해도 더 키웠다는 진단이다.
최근 이슈로 떠오른 개성공단과 관련된 설명에서 김 회장은 톤을 높였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과 전혀 연관이 없는 부분에서 생긴 마찰로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경제 문제에 정치 논리가 개입되는 건 말이 안됩니다.
핵 문제와 개성공단이 무슨 연관성이 있나요? 언론들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개성공단이 문을 닫을 것처럼 보도하는 것은 남ㆍ북한 모두에 이로울 게 없거든요."
지난해부터 정치논리에 휘말리면서 막대한 경영 차질을 빚고 있는 개성공단 사업을 놓고 연관된 주변 상황에 대해 그는 작심한 듯, 쓴 소리를 쏟아냈다.
금융위기가 끝나는 미래에 대비해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글로벌 경기 둔화로 올해에도 내수와 수출 모두, 그 어느 때 보다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며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 이번 기회에 내실 있는 경영 기반을 갖춰 나간다면 우리에게도 재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찾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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