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를 이끌어온 원로 교수들 가운데 예순다섯이 된 이들이 2월 정년퇴임식을 갖고 강단을 떠난다. 전공의 테두리를 벗어나 한국 지성의 고갱이를 이뤄온 학자들이기에 이들의 퇴임 소식이 주는 헛헛함이 작지 않다.
6ㆍ3세대인 이들이 차례로 현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강단의 중심도 서서히 1970, 80년대 학번 교수들로 이동하게 됐다. 하지만 이들에게 정년이 은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강의의 부담을 벗고 자유로운 연구의 출발선에 새로 선 석학들을 소개한다.
30년간 한국고전문학 텃밭 일궈
■ 고전이 가진 힘과 매력 / 임형택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한국 고전문학은 일제시대와 근대화를 거치며 맥이 끊겼다. 한문으로 된 고전을 읽고 전할 능력을 가진 학자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척박한 풍토에서 임형택 교수는 30년 넘게 우리 고전작품을 번역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본래 한문에 관심이 없었으나,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한 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한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학교에 한문학 과정이 없었기에 신호열, 성낙호 같은 재야 학자를 찾아 사숙했다.
고서점 창고에서 두터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혀졌던 수많은 문헌이 임 교수의 손을 거쳐 복원됐다. 권헌, 심대윤, 박종채, 이복휴, 성현 등등 그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조선 문인이 셀 수 없다.
그는 특히 실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 를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도 임 교수다. 현대문학의 여명기에도 관심이 많아 이태준 등에 대한 연구서도 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뇌종양 투병중에도 면학 열정
■ 불굴의 한국 유학 마에스트로/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금장태 교수는 학문적 업적보다 학문을 향한 열정의 학자로 먼저 인식된다. 정년이 되기까지 15년 넘게 뇌종양과 싸우며 매년 3권 이상의 저서를 써 낸 그의 의지는 가히 신화적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통일신라로부터 면면히 이어진 한국 유학의 학맥을 잇는 그에게 거추장스러운 것. 주변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금 교수는 "암환자라는 사실이 자랑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친다.
고대 유학에서부터 퇴계, 다산을 거쳐 근대 유학에 이르기까지 금 교수의 연구는 깊고 방대하다. 유학에 대한 비판적 탐구뿐 아니라 종교로서의 유학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1980년대 전국 곳곳을 샅샅이 훑어 70여명에 이르는 근대 유학자의 존재를 발굴한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전개된 유교개혁사상의 실체가 그에 의해서 조명됐다. 그는 요즘은 유교의 통사적 정리뿐 아니라 유ㆍ불ㆍ선 사상을 아우르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동·서양 철학 간극 통섭으로 메워
■ 동·서 문명의 대화를 위하여 / 송영배 서울대 철학과 교수
지금이야 동ㆍ서양 사상의 통섭이 일반화됐지만, 1960년대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양철학은 동양철학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런 서양철학이 한국 철학계의 주류였다.
이 시절 송 교수는 노장(老莊)의 사상에 매료돼 전공으로 선택했고, 동시에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으며 반제ㆍ반독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간극을 맨몸으로 메우는 일은 지난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체성은 스스로의 문화적 전통과 무관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신념은 확고했다.
서양철학을 하는 이들에게 동양철학의 지평을 이해시키는 것이 송 교수의 작업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국의 역사변동을 유교적 관료주의와 토지사유제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분석, 외국에서 더 큰 평가를 받았다.
도구중심적이고 정복적인 서양의 사유에서 벗어나, '생명적 소통'을 말하는 동양의 메시지를 동ㆍ서양 보편의 언어로 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근대사서 일제 잔재 씻어
■ 잃어버린 역사의 올곧은 복원 /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헝클어진 한국 근대사를 곧게 펴는 데 이 교수만큼 많은 노력을 쏟은 이도 드물다. 그는 '조선=은둔국'이라는 이미지가 19세기 후반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라는 것을 밝히고, 보부상단으로부터 걷은 세금으로 상업자본을 축적하려 한 고종의 노력을 조명했다.
이밖에도 그가 지운 우리 근대사의 얼룩은 셀 수 없이 많다.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제의 논리에서 한국 학계가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본래 조선 유교사회사가 전공이었지만 '유교망국론'이 결국 일제 식민주의의 잔재라고 판단, 그것을 청산하는 데 매진했다. 30여년 동안 펴낸 관련 논문이 무려 170편에 이른다.
2003년에는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 한국어로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2010년 한일합방 100주년?대비하는 연구로 여전히 분주하다. 최근 대한제국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각의 분위기도 그에게 극복해야 할 과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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