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1: 또 소변이 마렵다. 다녀온 지 20분도 채 안됐는데…. 오전에만 무려 10번 넘게 화장실을 들랑거렸다. 주변에선 핏기가 없고, 살도 빠져보인다고 한다(수분이 쫙쫙 빠지니 그럴 수밖에). 출근만 하면 증세가 도진다.
#증상2: 입 안이 자꾸 하얗게 헌다. 혀끝은 예리하게 베인 것처럼 아리고 쓰리다. 가끔은 구토가 쏠린다. 속도 아프다. 아침을 안 챙겨먹은 지도 꽤 됐다. 일만 집중하면 염증이 커진다.
짧은 의학지식을 동원한 진단은 이렇다. "전립선비대증 요도염 방광염 당뇨병(증상1), 구강염 위염 스트레스질환(증상2) 등이 의심됨, 전문의와 상의 요망." 그런데 비슷한 증상의 몹쓸 병을 팀 전체(음료개발 6명)가 벌써 몇 년째 앓고 있단다.
직접확인이 필요한 사안. 충남 공주시 장기면의 남양유업 중앙연구소를 찾았다. 유아식 유제품개발 식품안전분석 연구지원 음료개발 등 5개 팀 36명이다. 이중 증후가 뚜렷한 음료개발팀원(연구원) 3명을 만났다.
김상규(35ㆍ액상차 및 기능성음료 담당) 과장, 백구현(31ㆍ커피류) 주임, 배현정(26ㆍ기능성음료) 사원이다. 흰 가운을 입은 이들은 히트음료 '17茶(차)' '원두커피에 관한 4가지진실' 등을 탄생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불치병의 원인은?
문진(問診)이 시작됐다. "오전 8시 출근, 인터넷 및 각종 매체 통해 신제품 정보 확보." 평범해서 패스. "오전 9시부터 본격적인 '관능(官能)검사' 실시." 오감(五感) 중 미각을 활용한 검사란다. 뭔가 집히는 대목이 있다. 더 들어보자.
"음료가 될 법한 수백가지 원료를 함량, 추출온도, 우려내는 시간을 달리해 마시고 또 마시고, 이를 조합해 다시 마신다. 최적의 맛을 찾기 위해"(김 과장), "미각이 민감한 오전에, 그것도 공복에 검사해야 정확하고"(배 사원), "목 뒤까지 넘기는 샘플(보통 우유함유)도 있고, 입만 헹구고 뱉는 경우(향이 중요한 샘플)도 있다. 가끔 농도가 진해서 입안과 위장이 혹사를 당한다."(백 주임)
매일 오전 쉬지않고 뭔가를 마셔대니 화장실 자주 가는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화학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연구소에서 손수 만든 각종 원액을 직접 시음까지 하니 혀와 구강에 무리가 가는 건 당연하다. 결국 이들의 증상은 세상의 모든 음료개발자가 떠안고 살아가는 직업병인 셈. 쉽게 마시고 던져버리는 그 숱한 음료에 맛보다 먼저 녹아있는 건 이들의 땀이다.
생존확률 1%
그러나 시장엔 수많은 음료가 명멸한다. "100개 중 1개만 살아 남아도 성공"(김)인 적자생존의 정글이다. 더욱이 세상의 빛은커녕 이름도 없이 유산(流産)되는 후보 음료는 출시상품의 10배란다. "1년에 아이디어만 40개, 그 중 후보제품 단계는 20개, 정작 상품화하는 건 2, 3가지 정도, 그나마 히트 가능성은 시대가 안다"(배)고 했다. 사람처럼 시대를 잘 타고나야 음료계의 영웅이 된다는 얘기다.
쉽지않은 작업이다. 무엇보다 머리 속엔 아른아른 '이거다' 싶은 맛의 정령이 맴도는데, 말로도 실체로도 표현할 길 없으니 답답할 노릇. 설상가상 소비자들은 맛은 당연히 기본이고 추가로 '기능'(건강 다이어트 숙취해소 등)까지 원한다.
'맛'과 '기능'은 음료 구성상 본디 '한 지붕 두 가족.' 맛을 살리면 기능이 죽고, 기능을 높이면 맛이 떨어지는 게 보통이다. 둘의 적절한 화합을 주선하는 게 음료개발자의 절대 덕목이다. 수백, 수천가지 조합의 샘플을 제작, 구토가 치밀만큼 마셔대도 목이 마르다. 소비자의 기호를 정확히 간파해야 하기 때문.
그러니 음료를 창조하는 일이 비좁은 연구실에서 끝날 리 없다. 남은 갈증은 현장에서 채운다. 최고의 원료(하물며 보리도 지역마다 맛 차이가 난단다)를 찾기 위해, 고수의 맛(기성품이 아닌 수제품)을 음미하기 위해, 애써 만든 맛을 검증(타깃 마케팅) 받기 위해, 까다로운 소비자(트렌드 조사)에게 묻기 위해 방방곡곡을 누빈다.
역작 17차가 대표적이다. 17가지 원료를 얻으려고 6개월 넘게 전국의 한약방과 약재상을 뒤졌고, 이들을 적절히 혼합해 나름의 황금비율을 완성하기까지 2년(2006년 3월 출시)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10년차 김 과장은 "우리 몸에 좋은 원료를 17가지나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여러 성분을 혼합하다 보니 작은 함량, 미세한 온도 차이에도 맛이 천차만별이었다"며 "공들인 시제품이'보리차 때론 한약 같다'고 외면당했을 땐 야속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300회가 넘는 외부 테스트(시음행사)와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백문(百聞)이 불여일음(不如一飮)' 전략을 택한 것. 결국 깔끔하고 쓴맛을 선호하는 일본과 달리 국내 소비자는 부드럽고 구수한 맛을 좋아한다는 답을 얻은 뒤에야 '그만그만한 녹차와 다른' 17차 본Ю?맛이 탄생했다. 지금까지 2,500만개가 넘게 팔렸단다.
특효약은 정직
"17차의 성공은 광고모델 전지현 효과 덕 아니냐"고 슬쩍 도발을 해본다. "그보다 더한 광고비를 퍼부었어도 운명을 달리한 제품이 수없이 많다. 맛은 만드는 사람에게도, 즐기는 사람에게도 정직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광고가 호기심을 자극할 순 있어도 지속적으로 입맛을 매료시킬 수는 없는 법.
제품의 실패보다 "마실 게 없다"는 세간의 평이 더 속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합성 향을 넣지않고 천연재료만을 우려낸 맛이자"(배), "몸에 좋은 기능을 골고루 함유한데다"(김), "몇 개월간 배앓이까지 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는데"(백) 말이다.
그래도 맛의 진실은 믿는다. 아직 만들어야 할 음료도 많다. "카페인 없는 유아용 차나 비만 예방하는 어린이용 녹차"(김), "정말로 살이 빠지는 차"(배), "첫 맛과 끝 맛이 같은 캔 커피"(백) 등이다.
소망은 한가지. "익숙한 맛(음료)만 찾지 말고 신제품이 나오면 도전해보세요. 정직과 진실로 우려낸 우리의 숨결이 스며있으니까요."(배) 섭섭할 법도 하지만 이들의 직업병이 당분간 완치되지 않았으면 한다.
공주=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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