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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희망 찾는 사람들] <5> 조손가정 한영이 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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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희망 찾는 사람들] <5> 조손가정 한영이 삼형제

입력
2009.01.08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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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노원구의 한 성당. 토요일 어린이 미사가 끝난 뒤 재잘거리며 성당을 빠져나가는 아이들 사이로 복사(服事ㆍ미사 때 사제의 시중을 드는 사람) 연습에 한창인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박한영(12) 한주(11) 한별(9)군 삼형제였다.

맏이 한영과 둘째 한주는 2,3년 전부터 복사로서 신부님 시중을 들며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 막내 한별은 아직 첫 영성체를 받지 않아 복사로 설 수 없지만 형들 어깨 너머로 연습을 시작한 지 오래다.

"커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신부님이 되고 싶어요." 또래 아이들이 흔히 꿈꾸는 장래희망과는 사뭇 다른, 삼형제의 한결 같은 바람이다. 한영이 할머니(62)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정해진 시간이 되면 빠지지 않고 성당에 가서 복사 활동을 한다"고 귀뜸했다. 할머니는 어려운 환경에도 꿈을 갖고 일찍 철이 든 삼형제가 대견할 뿐이다.

한영이 삼형제는 10년 전 외환위기의 상처를 고스란히 품에 안은 'IMF 베이비'들이다.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한영이 부모는 1998년 외환위기의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당시 운영하던 소규모 컴퓨터 부품 공장의 문을 닫았다. 부모는 불화 끝에 3년 뒤 남남으로 갈라섰고 삼형제는 할아버지댁에 맡겨졌다. 한영이 다섯 살, 한별이가 갓 돌을 넘겼을 때였다.

고령에 생활 형편도 여의치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어린 삼형제를 돌보기는 벅찼다. 할아버지(72)는 당뇨에 위장병까지 겹쳐서 거동이 불편하고, 할머니도 10년 전 덜컥 찾아온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치매 초기 증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래도 할머니는 세 손자를 건사하려고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폐품 수집을 한다. 하지만 폐품 팔아 버는 돈이래야 한 두 달에 10만원 남짓이다. "이마저도 요즘은 폐지 값이 떨어져 벌이가 쉽지 않다"고 한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나오는 월 60만원에 폐지를 팔아 번 돈을 보태도 다섯 식구 먹고 입고 아이들 공부 시키려면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한영이네는 방 세 칸에 화장실까지 딸린 단독 주택에 산다. 성당에서 알게 된 이웃의 호의로 집세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한영이네가 이사오기 전 오래 비워뒀을 정도로 워낙 낡은 집인데다 난방이 되는 방은 하나 뿐이다.

게다가 10㎡ 남짓한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겨울을 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두 달 뒤면 일대 재개발로 헐리기 때문이다. 동네 담벼락 곳곳에는 '철거예정'이라는 글씨가 휘갈겨 쓰여져 있다.

3년 묵은 빈집을 살 만하게 고치느라 예전 살던 월세 보증금 250만원을 모두 털었던 한영이네는 그야말로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 "늙은 우리야 어떻게 되든 살겠지만 어린 것들이 마음에 상처나 입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할머니는 당장 닥쳐 올 집 걱정에 날 밤을 새기 일쑤다.

이렇듯 팍팍한 생활이지만 장남인 한영이는 아직 어리광을 부릴 나이인데도 의젓하게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하고 있다. 편찮은 할아버지 수발, 어린 동생들 뒷바라지에 집안 정돈까지 걱실걱실 해낸다. 할머니가 폐품을 팔러 걸어서 20분 걸리는 고물상까지 가는 날이면 기꺼이 등짐까지 진다. 할머니가 안쓰러워 "공부나 하라"고 말려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

한영이는 학교 성적도 상위권에, 상도 자주 받아 온다. 창고방 한 구석에는 한자대회, 줄넘기대회, 영어대회에서 한영이가 받은 상들이 쌓여 있다. 한영이는 그래도 "저는 한자대회에서 은상을 탔는데 한주는 금상을 탔어요"라며 동생 자랑 하기에 바쁘다.

다섯 살 때 사고로 왼쪽을 눈을 다쳐 시력을 잃은 막내 한별이를 챙기는 마음도 각별하다. "요즘은 방학이라서 항상 붙어있으니까 한별이가 눈 때문에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질 때 잡아줄 수 있어 좋아요. 좀 더 크면 한별이 눈을 꼭 고쳐줄 거예요."

한영이 삼형제가 요즘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가 지난해 10월부터 연결해 준 대학생 선생님과의 공부시간이다. 선생님이 찾아오는 월요일이면 한영이는 일주일 동안 공부하며 잘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모아 선생님 앞에 꺼낸다.

형이 하는 일이면 뭐든 같이 하려는 한주, 한별이도 공부거리를 들고 형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평소 수줍음이 많은 한영이지만, 선생님 앞에선 고민 상담도 하며 속내를 털어놓고 지낸다. 내색은 안 하지만 다섯 살 때 헤어진 아빠와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숨어 있다.

생활은 어렵지만 다섯 식구가 무릎을 맞대면 어느새 한숨은 자고 웃음이 피어난다. 요즘 부쩍 쇠약해진 할아버지를 위해 삼형제가 돌아가면서 밤늦도록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는데, 특히 막내가 할아버지 볼에 뽀뽀를 하며 재롱을 떠는 통에 더 많이 웃을 수 있다.

"나도 올해는 형들처럼 복사 활동을 열심히 하고 싶다"며 새해 소망을 외치는 막내 한별이, 새해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이 소원이라는 듬직한 한영이와 한주. 성당에 나란히 앉아 기도하는 삼형제, 그들이 비록 가난하지만 성경 구절처럼 하늘 나라는 그들의 것이리라.

후원 문의 : 굿네이버스 (02) 6717-4000 www.goodneighbors.kr

김성환 기자 bluebir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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