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
북한산성길, 돌틈에 피어난
들국화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날이었던가. 광화문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왜 이리 찬가 묻기, 빌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女人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한 명동이 아니어도, 동지만 지나면 해도 노루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 연안 양지쪽 흙마루에서 새 순 돋은 무우를 다듬고 계실 눈 어둔 어머님을 위해 이 세모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야 한단 말일까.
문경 새재 산막 곁에 흰 떡 구워 팔던 그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소녀도 지금쯤은 누구 그늘에선가 지쳐 있을 것.
꿀꿀이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 그 소년의 염원이 멎어 있는 그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또 얼마나 다숩게 그 옛날 목홧단 말리던 아낙네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 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 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의 체온으로, 그 낭만들이 뿌려진 판문점 근처에도
(후략)
어느새 38선에만 있는 줄 알았던 판문점이 세상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퍼져간 것일까. 곧, '진이의 체온'을 가진 새 해가 뜨리라는 믿음으로 샘 속의 얼음을 부순다. 하늘의 커다란 눈동자가 샘 속에서도 빛날 수 있도록.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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