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을 탓하지 말라…견실 경영·질적 성장 내가 해낸다"
#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머릿속은 요즘 갖가지 수치들로 가득하다.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생명보험사의 지급여력비율 같은 각종 건전성 관련 수치가 요즘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 때문. 이 회장은 매달 2차례씩 계열사 사장들을 모아 리스크관리 회의를 가지며 직접 수치들을 거론해 가며 실시간 유동성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 지난 7월 취임후 첫 현장경영에 나선 이 회장은 서울 명동의 우리투자증권 지점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 신참 직원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덥썩 잡았다. 몇년 전 신입사원 면접 때 봤던 직원을 우연히 만난 게 반가웠던 것이다. 이 회장이 떠난 후 지점 직원들은 "면접 때 잠깐 스쳤던 말단 직원의 이름까지 기억하시다니…"라며 감동에 휩싸였다.
올 6월 우리금융지주 4대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에게 2008년은 한편으론 야속한 해였다. 38년 '뱅커' 인생의 정점에 올라, 한껏 꿈을 펼쳐 보려는 찰나에 마침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세계적 금융위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미뤄진 꿈
이 회장이 취임 초 야심차게 밝혔던 임기중 목표는 현재 금융위기라는 '타의'에 의해 모두 미뤄진 상태다. 2001년 지주 출범 이래 매년 최대 과제이기도 했던 '성공적인 민영화'는 열악해진 증시 환경 등에 의해 자연히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이 회장이 취임 일성으로 밝혔던 "300조 규모인 지주사 자산을 임기중 500조~600조 규모로 늘려 글로벌 30위권 금융그룹을 만들겠다"던 포부 역시 인수합병(M&A)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지금의 환경에서는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여기에 지난해까지 장차 금융의 블루오션으로 여겨지며 우리은행이 앞장서 국내 투자 분위기를 선도해 왔던 부채담보부증권(CDO), 신용디폴트스와프(CDS) 등 신용파생상품 투자는 올들어 금융위기 여파로 뜻하지 않은 큰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이 회장은 "마치 소가 걷듯이 지금의 금융위기는 오래 전부터 소리 소문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이 같은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남을 탓하기에 앞서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대응책을 준비 못한 우리들의 책임이 크다"고 회고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부드러운 리더십
이 회장에게는 40여년의 사회생활 가운데 특이한 경력이 있다. 바로 우리금융 회장 취임 직전 맡았던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 경력이다. 2004년 서울시향 대표가 된 그는 당시 1억4,000만원에 불과했던 시향 자체 수입을 3년 후인 2007년 33억원으로 늘려 놓았다. 또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씨를 예술감독으로 영입, 경영과 공연을 분리하는 획기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결과는 대성공. 서울시향은 최근의 성공을 토대로 이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는 얼마전 강연에서 "서울시향 대표로 활동하는 데 금융업에서 익힌 경영 노하우가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다른 분야의 사람이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봤을 때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더 발전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더 객관적이고 창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었던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인재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서울시향에서도 부임 즉시 단원들의 연주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과감하게 정명훈씨를 영입한 데 이어 단원들도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그는 "런던 뉴욕 암스테르담 등에서 총 8회에 걸쳐 열린 오디션에 응시한 음악도만 2,500명에 달할 정도로 서울시향 들어오기가 사법시험 패스하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이 회장의 서울시향 경영혁신 성공사례는 미국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그는 "본업인 금융권으로 돌아오니 친정에 온 것 같이 편안하지만 요즘 각광받는 '감성경영' '감성리더십'을 서울시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발휘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 회장은 최근 잇따라 우리금융지주 주식을 사들이고 있다. 자기 돈을 들이는 것인 만큼, 지주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고서는 힘든 일이다. 그는 "앞으로도 조금씩 꾸준히 사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가가 많이 떨어져 저평가 상태고 또 지금 내가 사야 직원도 사고 고객도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회장은 "주가가 많이 떨어져 투자자들의 마음이 많이 상하겠지만 우리금융에 대한 확신을 가져달라"며 "장기보유시 분명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2009년을 맞는 이 회장의 경영전략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다. '견실경영을 통한 질적성장'이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비용절감과 경영효율성 제고를 통한 견실 경영을 먼저 추구하고 다음으로 수익성 개선 등 경영체질의 근본적 개선을 통해 질적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이 회장은 최근 그룹 내부에 크게 4가지 실천과제를 당부했다. ▦비상경영 체제 아래서 전 계열사가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할 것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각 사업단위별 방안 수립 및 최적의 실행방침 공유를 통한 그룹 시너지를 창출할 것 ▦건전성 확보와 경영체질 개선을 통한 질적 성장을 추구할 것 ▦교과서적인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우선할 것 등이다.
■ 李회장의 위기 극복 경영전략 '변화'와 '단결'
이팔성(사진) 회장의 위기극복 경영전략은 '변화'와 '단결'로 요약된다.
무엇보다 다양한 금융 계열사간 시너지 창출은 위기극복에 있어 필수. 이 회장은 해법을 시스템 활성화에서 찾고 있다.
그는 "시너지는 400m를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릴레이"에 비유했다. 시너지 창출을 위해 전담조직과 계열사의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관련 데이터베이스(DB) 구축과 성과관리 정교화 등 시스템 활성화를 통해 직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인재는 영입하는 것이 아니라 육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세계적 기업이 된 삼성, 현대, 포스코도 내부에서 강하게 단련된 인재가 있었습니다. 우리금융지주의 강점이 바로 위기를 극복한 성공 유전자를 지닌 인재가 많다는 것인데, 이런 유전자들이 앞으로 지주 체제에서 더욱 빛을 발하도록 계열사간 교차발령을 통해 책임감 강한 지주사형 인재를 육성할 생각입니다."
서울시향 CEO 출신답게 그는 혁신의 방법도 음악용어로 표현했다. '빠르지만 너무 빠르지 않게'(알레그로 마 농 트로포ㆍAllegro ma non troppo). 혁신의 속도는 시대의 변화보다 빨라야 하지만 속도에 집착해서 리스크를 간과하거나 조직이 따라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조직의 역량과 전략적 우선순위를 감안해 강하고 속도감 있는 지속적인 혁신으로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다.
단결은 그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그는 우리금융그룹의 '우리'를 유일무이(only one)한 존재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금융이 지주사 체제가 되면서 누가 강한 일체감을 가지느냐가 승패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게 그의 판단. 이 회장은 "우리금융의 '우리'는 문법적으로는 복수지만 본질은 동질성이 강조된 단수인 만큼 앞으로도 비전 공유와 일체감 조성을 통해 '하나여서 더 강한 우리'로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금융을 하나의 거대한 '금융 오케스트라'로 연주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금융은 전통적으로 리스크 산업이기 때문에 얼음보다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지만, 고객의 니즈가 금융 토털 서비스를 요구하는 시대가 온 만큼 10개의 계열사가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앞으로 고객을 감동시키고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하모니를 연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