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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간을 낭비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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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간을 낭비하는 즐거움

입력
2009.01.08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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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속도를 보고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면, 누군가 내가 경보 경기에 출전한 듯 빨리 걷는 걸 보고는 성격이 급하고 그 탓에 마음이 늘 분주하며 일을 끝마치기 위해 여유 없이 서두르는 편이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다.

천천히 걷는 습관이 생긴 것은 순전히 외국의 낯선 거리에서 길을 몰라 헤매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낯선 곳에서 의지가 될 것은 지도뿐이지만, 지도를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어림짐작으로 방향을 잡아 목적지를 찾아가고는 했다. 낯선 곳에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으니 결과야 뻔한 노릇이다.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지도를 보는 눈이 빠른 사람들과 달리 길을 헤맬 수밖에 없고, 같은 길을 여러 번 되풀이해 걸어야 하고, 그러느라 많이 걸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이 당연히 늦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길을 헤매며 천천히 걷다가 나는 새삼스러운 여러 가지 풍경을 만났다. 옷을 여미게 하는 추위에도 길가에 아직 잎이 붉은 꽃이 남아 있는 화단이 제법 많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길에 서 있는 녹나무는 수령이 260년이 넘었는데 인도를 넘어 2차선 도로를 아우를 정도로 그늘이 넓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과, 어떤 길은 자주 열차가 지나가고 그럴 때면 덜컹거리는 보호 막대가 경고음과 함께 천천히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또 어떤 길에는 가운데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옆으로 벚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 무렵이면 보기 좋게 단풍이 물든다는 것과 바람이 불 때면 새처럼 가볍게 강물 위로 떨어진 낙엽이 유유히 흘러간다는 것도 알았다. 기계 틀에 반죽을 붓고 빵을 굽는 아저씨가 한 판에 다 밀가루를 따르고 나서야 잠깐 땀을 닦는 것을 알았다. 천천히 걷자 익숙한 곳에서 목적지만을 향해 빠르게 걸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주변과 풍경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늘 가장 빠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선택만을 해왔다. 전적으로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였다. 시간이라는 것은 계획을 세워 아껴 써야 하는 것이었고 쪼개고 쪼개어 조직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관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어김없이 바빴고 초조했고 시간에 쫓겼고 그럼에도 시간이 부족해서 일이 성에 차지 않는다고 울적해 했다.

해마다 세밑이면 한 해 동안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버린 걸 반성했다. 게으른 나를 자책했고 효율적이지 못한 것을 반성했으며 반성 끝에는 당연한 순서인 듯 새해에는 좀더 부지런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올해만큼은 천천히 걸어 다니느라 시간을 아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을 작정이다. 시간은 아끼기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낭비도 해야 하고 버리기도 해야 하고 버린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걷는 동안 주변을 바라보면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깨달은 탓이다.

시간에 대한 갖가지 금언들 역시도, 시간은 아끼고 아껴 써야 한다는 걸 말해 주지만, 나는 이제 그런 금언들에도 속지 않을 생각이다. 애당초 시간이라는 것은 쪼개고 쪼개어도 모자란 것인지도 모르다. 어차피 부족한 것이라면 좀더 느긋이 천천히 즐겁게 내 맘대로 시간을 즐기고, 자주 버리고, 할 일 없이 낭비도 해 볼 작정이다.

그러고 나서도 반성하거나 자책하지 않을 생각이다. 새해 다짐으로서는 참으로 볼품없지만, 그러는 속에서 새해에는 좀더 느린 호흡으로 새로운 시간을, 새로운 거리를,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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