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간다. 지난 한 해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터진 촛불집회가 그러하다. 여중생부터 유모차부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달려 나와 장마비에도 불구하고 수십 일간 거리를 메우며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 이 시위는 한국 민주주의 운동사, 아니 세계 민주주의 운동사에 길이 남을 감동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뜨거웠던 촛불이 연이은 사회적 의제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사그라진 것도 놀랍긴 마찬가지다. 그 뜨거웠던 촛불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실용' 저버린 MB 안타까워
세계를 공포로 몰고 간 월스트리트 발 금융위기역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 동안 미국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온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가져온 이 위기는 이제 1930년대에 이은 제 2의 세계공황으로 번져 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이명박 정부이다. 이와 관련, 주의할 것은 이념적 성격과 스타일을 구별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일부에서는 좌파딱지를 부쳤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이념적으로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언행 등 스타일이 급진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에 처음 가서 한 발언, 즉 "미국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북한의 강제수용소에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않아 감사하다"는 발언이다. 이것이 이념적으로 과격한 발언인가? 아니다. 친미를 스타일면에서 과격하게 했을 뿐이다.
이 같은 스타일의 급진주의, 과격성에서는 이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시절 밀어 부치는 불도저식 추진력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공사기간을 단축시켜 가며 주요 공사를 완성시킨 이명박 신화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대통령이 정치를 마치 공기단축 문제인 것처럼 착각하여 '속도전' 운운하며 주요 정책들을 힘으로 밀어 부치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한편 이념성은 약간 차원을 달리 한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보수적 정치인이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내의 냉전적 보수세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중도적이고 극우적 이념노선보다는 실용주의를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 전면적인 이념전쟁을 선포하고 이념공세로 나가리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행태는 놀랍기만 하다. 국가정체성 운운하며 사실상 전면적인 이념전쟁을 선포하고 나섰고 대북정책 등에서도 실용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이 내세웠던 실용주의는 일종의 위장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상황적 산물'처럼 보인다. 이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촛불시위라는 예상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고, 임기 초기 대통령으로는 유례없이 낮은 지지율을 기록해야 했다. 성공신화에 익숙한 이 대통령으로서는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결국 이 모두가 좌파의 음모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같은 인식이 기이한 마녀사냥과 이념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즐겁게 놀라운' 새해 되길
그 대표적인 예가 자신들이 추진해온 정책의 차질이 좌파적 고위공직자의 저항 탓이라는 기이한 마녀사냥이다. 대북정책도 금강산 총격이라는 우발적 사건이 있은 데다가 사건 직후 행한 국회연설에서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유화적 입장을 취한 것이 일종의 족쇄가 되어 이후 강경노선으로 나가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즐겁게 놀라운 일보다 우울하게 놀라운 일이 많았던 한해였다. 새해에는 반대로 우울하게 놀라운 일보다 즐겁게 놀라운 일이 많기를 빈다.
< 그동안 손호철의 정치논평을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