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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이세돌, 물오른 수읽기·배짱… '非情의 승부사'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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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이세돌, 물오른 수읽기·배짱… '非情의 승부사'로 우뚝

입력
2008.12.29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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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쎈돌'은 강했다. '세계 바둑계의 천하무적' 이세돌이 지난 22일 막을 내린 제36기 하이원배 명인전 결승 5번기에서 '하늘이 내린 속기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열아홉살 소년 강호 강동윤을 3대1로 꺾고, 2년 연속 명인위를 차지하면서 우승 상금 1억원의 주인이 됐다.

최근 세계 바둑계는 이세돌이 부르는 '나홀로 아리랑'이 산과 들을 온통 휘감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올초 삼성화재배, LG배, 도요타덴소배, TV바둑아시아선수권 등 4개 세계 타이틀을 잇달아 따낸 데 이어 연말에 다시 콩지에와 구리 등 중국의 최고 기사들을 잇달아 물리치고 삼성화재배와 LG배 결승에 또 이름을 올려 내년도 타이틀 획득을 '예약'했다.

국내 기전에서도 이미 명인 2연패에 성공했고 국수전(상대 목진석)과 박카스배 천원전(상대 강동윤)에서 현재 타이틀 매치가 진행 중이다. 게다가 빡빡한 대국 일정 속에서도 용케 짬을 내 중국 리그에도 자주 출전, 올해 8전 전승을 거두는 등 대체 '쎈돌'의 무한 질주가 어디까지 계속될 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과연 이 같은 이세돌 바둑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틀에 한 판 꼴로 공식 대국을 치러야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도 '이겨야 할 판'은 반드시 이겨내는 그 힘의 비밀을 분석한다.

◆ 무시무시한 승부 근성

이세돌의 바둑에는 항상 매서운 칼바람이 인다. 실제로 바둑판 앞에서 강렬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볼 때는 묘한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기고, 눈을 수없이 깜빡이고, 손가락으로 돌통을 톡톡 두드리다가 바둑알을 쓱 뽑아들 때는 풀숲을 박차고 나오는 젊은 사자 모습 그대로다.

기존의 사냥법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변화무쌍하다. 아군이 아무리 엷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찌르고, 베고, 죽이고 죽는 난해한 줄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벼랑 끝의 싸움일수록 더 독하게 파고드는 배짱 하나는 타고 났다.

'피 냄새'를 맡을수록 펄펄 솟구쳐 오르는 '쎈돌'의 무시무시한 승부 근성 앞에 수많은 절정 고수들이 판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장면 1> 은 제36기 하이원배 명인전 결승 5번기 제4국. 백을 든 이세돌이 상대인 강동윤의 빈틈을 파악했다는 듯 서슴없이 흉내 바둑을 들고 나왔다. 상대가 고심 끝에 착점하면 바람보다 빨리 돌을 들어다 날랐다. 강동윤이 천원을 차지해 흉내 바둑을 끝내고 후 하변 쪽에 어느 정도 확정가를 완성해 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백1이 '쿵' 소리를 내며 반상에 떨어졌다.

당시 이 바둑을 검토하던 내로라 하는 프로기사들도 전혀 예상 못한 독수였다. 마치 죽창으로 상대의 꽁무니를 찌르는 듯한 아픔과 함께 이 한 수로 인해 강동윤이 그 동안 공들여 쌓았던 성벽이 한순간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를 지켜 보던 명인성의 옛 성주 서봉수가 한 마디 던졌다. "이세돌의 착수에서는 항상 죽음의 냄새가 난다."

◆ 잔수가 강하다

이세돌의 바둑은 철저하게 실전적이다. '자충'과 '우형'이란 말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남들이 꺼려 하는 '꼬인 행마'도 서슴없이 들고 나온다.

절정기 때의 조훈현과 조치훈보다 훨씬 더 빠르게, 훨씬 더 엷게 판을 짜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돌이 얽히고 설킬 때 판을 헤쳐 나가는 수읽기 능력이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평범을 송두리째 거부하기 때문에 '다음 한 수'는 으레 예상을 벗어난다. 예측 불허의 각도에서 날카롭게 파고든 뒤 상대의 실수를 냉큼 낚아채는 싸움 솜씨는 어느덧 그의 대표 브랜드가 됐다.

남보다 더 빠르게 수를 읽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지 않는 비정함과 독기가 그의 '잔수' 속에 숨어 있다. '변하지 않는 청산'으로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 온 김인 '국수'가 남긴 다음 말을 이세돌은 이미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승부의 세계에서 비정(非情)은 미덕이다."

◆ 최강의 흔들기

이세돌의 수읽기는 낯설고 집요하다. 상대방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주저하지 않고 접어든다. 승부처를 맞아 이세돌이 던지는 한 수 한 수는 마치 배고픈 사자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사냥감을 낚아채듯 단호하다.

한 번 물면 지옥 끝까지 끌고 들어가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때론 촘촘하게 때론 성글게, 자유자재로 풀고 당기는 그의 억세고 질긴 그물에 세계의 내로라 하는 승부사들이 모조리 걸려 들었다. .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역전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말이 나올 때 조심해야 한다." 후배 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다. 이세돌의 '강펀치를 동반한 흔들기'에 얽혀 들어 좋은 바둑을 순식간에 역전패 당한 아픈 기억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장면2> 는 제36기 명인전 결승 제2국의 중반 상황. 국湧?흐름이 꼬였다고 판단한 이세돌이 백2, 4로 중앙에 은근하게 덫을 만들어 놓은 다음 백6으로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뇌관에 불을 붙였다. 흑7에 백8로 모질게 흔들어댔고 결국 이 패를 등에 업고 상변 흑진을 쑥밭으로 만들며 불계승을 거둬 제1국의 패배를 설욕,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 전광석화의 수읽기

이세돌의 수읽기는 한마디로 '번개'다. 호기심과 욕망, 의욕이 한데 뒤엉켜 고압전류를 타고 흐르듯 팽팽하게 일직선으로 내려 꽂힌다. 순간 껍데기는 타고 알맹이만 판 위에 남는다. '속기의 제왕'이란 소리를 들으며 이창호의 벽을 넘어선 기세의 강동윤도 이세돌의 '시간차 공격'에 흐름을 잃고 명인전에서 패퇴했다.

<장면 3> 은 제36기 명인전 결승 제3국. 중앙 접전에서 밀린 강동윤이 흑1 때 백2부터 8까지 약간 욕심을 냈다. 그러자 이세돌은 이미 이 부근의 변화를 완벽히 읽어두었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빛살보다 빠른 속도로 흑9로 되단수 쳐 패를 만든 뒤 결국 패의 대가로 A, B를 연타, 간단히 우변 백돌(△)을 잡아 단숨에 우세를 확보했다.

이세돌의 수읽기는 '가혹'하다. 한때 자만과 방심의 덫에 걸려 무리하게 싸움을 걸다가 스스로 자멸한 적도 있지만 결혼 후 생활이 안정되면서부터 요즘은 확연히 달라졌다. 일거에 판을 휘감아가는 '파죽지세의 수읽기'와 '야수와 같은 투혼'은 '세계 바둑계의 마왕'이란 무시무시한 별명이 전혀 낯설지 않다.

이세돌은 한국 바둑계의 행운아다. 이창호라는 당대 거목이 앞서 길을 활짝 열어주었고 동갑내기 라이벌인 중국의 제1인자 구리와 박영훈 최철한 강동윤 등 후배 강호들이 맹렬히 뒤를 쫓으며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황금어장의 최대 선주가 되기 위해 이세돌은 한 시도 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먼 바다를 향해 한 발 앞서 달려 나가고 있다.

아직 스물다섯의 훤훤장부인 이세돌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다. 과연 누가 이세돌의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까. 한국 바둑계 뿐 아니라 세계 바둑계의 당면 과제다.

박해진 (시인·바둑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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