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 전쟁을 선포한 한나라당이 왜 한미FTA 비준동의안 상임위 단독 상정부터 강행했는지 모르겠다. 미국의 정권이 교체됐다고 FTA협정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매우 특별한 상황이다. 내달 출범할 오바마 정부가 자동차 관련 분야에 어떤 형태로든지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고, 우리로서도 전혀 새로운 금융 환경에 따라 관련 조항들을 숙고해볼 필요가 생겼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국민들 사이에 한미FTA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 없이 한나라당이 문 걸어 잠그고 비준동의안 상임위 상정을 단독으로 처리함으로써 야당에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큰 망치와 전기톱이 동원되고 소화기가 분사되는 난장판이 벌어졌고 엄청난 비난이 여의도에 몰아쳤다. 국제적 망신도 샀다.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정치권 전체에 대한 환멸을 키웠지만 1차적 비난은 망치와 전기톱을 동원한 민주당에 쏟아졌다. 며칠 후 실시된 몇몇 여론조사 결과는 좀 의외다. 물리적 충돌 책임이 한나라당에 있다는 응답이 민주당에 비해 15%포인트나 높았다. 한나라당 지지도는 떨어진 반면 민주당 지지도는 5%포인트 안팎의 상승세를 보였다. 정치권이 싸우면 여당이 손해라는 사실이 또 한번 입증됐다.
정치권 싸움은 여당에 불리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쟁점법안 처리강행에 맞서 본회의장 점거 등 초강경으로 나오는 데는 여론의 이런 흐름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는 "탄핵 때처럼 끌려나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려는 자해정치"라고 민주당을 비난했다. 하지만 우선순위 판단과 전략적 고려 없이 손해가 뻔한 상황으로 끌고 가는 것은 바로 한나라당이다. 민주당은 나중에 얻을 거라도 기대해 자해를 한다지만 한나라당은 얻을 것도 없이 자해의 길을 가는 셈이다.
한나라당은 뒤늦게 시급히 처리해야 할 경제 살리기 법안과 위헌 또는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은 법안 등 중점처리 법안을 분류해 처리한다고 부산하지만 민주당을 협상장으로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예산안 '사기 처리'와 한미FTA 비준동의안 상임위 단독 상정 파동으로 불신을 키워놓은 탓이다.
172석의 한나라당이 내부 결속이 느슨하다지만 수의 힘으로 법안들을 강행처리하려고 들면 못할 것도 없다. 민주당과 민노당은 '옥쇄'가 됐든 '자해'가 됐든 끝까지 저항하다가 장외투쟁의 수순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 실현된 사례는 드물지만 의원직 총사퇴론도 나오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이명박 정부 2년차에 들어 정치적인 평화는 없다.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들을 실질적으로 펼쳐야 할 해에 여의도는 사사건건 육탄저지와 강행처리를 되풀이하며 강경 대치로 지고 샐 것이다. 여기에 급증하는 실업과 서민 생계난이 맞물리면 정치사회적 불안과 긴장이 급격히 고조될 게 뻔하다. 그런 상황은 이명박 정부에 올해의 촛불시위 국면 못지않게 힘든 시련이 될 것이다. 이를 피하려면 한나라당은 며칠 남지 않은 올해의 정치판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민에 감동을 주는 정치를
소수파의 무력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민주당에도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거대 여당이 물꼬를 틀 수밖에 없다. 먼저 야당에 국회 정상화에 응할 수 있는 퇴로를 열어 줘야 한다. 다수파와 소수파, 강자와 약자의 협상에서 꼭 필요한 절차다. 그런 다음에 경제 살리기 법안 등 시급한 것부터 처리해 나가는 수순을 취한다면 민주당도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조건 강경만이 새로운 정체성 정립을 고민하는 민주당에 득 될 리 없기 때문이다.
지난 봄 총선에서 압승한 한나라당이 지금까지 국민에게 감동을 줬던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지지도보다 10%포인트나 높은 30%대 지지도를 누려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경제난 심화와 맞물려 하락세로 돌아섰고, 20%대까지 떨어진 조사결과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엔 지금 상황이 기회이자 위기다. 어떻게 하면 기회이고 위기인지는 한나라당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이계성 논설위원ㆍ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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