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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폭풍전야/ 역풍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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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폭풍전야/ 역풍의 정치학

입력
2008.12.2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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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의 국회 대치가 ‘강 대 강’으로 치달을수록 여당의 강행 처리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해 여당이 단독 처리 카드를 빼낸다면 과거의 사례에서 보듯 어느 정도의 역풍은 감수해야 할 듯하다. 한나라당이 역풍을 각오하고서라도 밀어붙일지, 한발 물러설지 선택의 시간은 가까워지고 있다.

과거 사례를 살피면 여권 또는 다수당의 강행 처리는 대부분 후폭풍을 불렀다. 그 양상도 다양하다. 우선 1996년 12월 26일 새벽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복수노조 허용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안 등 20여개 법안을 단독 처리 한 사례가 자주 거론된다. ‘노동법 날치기 사태’로 불리는 이때의 단독 처리는 이후 여당에게 거센 역풍을 불렀다. 국회 마비, 노동계의 총파업, 여론 악화로 김영삼 정권 레임덕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노동법도 결국 이듬해인 97년 재개정됐다.

김대중 정권 2년차인 99년 1월에는 당시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한일어업협정 비준동의안, 교원노조법 등 70여개 법안을 한나라당 불참 속에 단독 처리했다. 이후 한나라당이 강력히 저항에 나서며 99년 한 해 정국은 내내 경색됐다. 다만 이때는 정권 교체 초기여서인지 노동법 날치기 때와 달리 국민적 저항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2004년 3월 12일에는 당시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켜 여론의 거센 역풍을 불렀다. 당시 소수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육탄저지에 나섰으나 본회의장에서 끌려나갔다. 탄핵안 가결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촛불집회 등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고, ‘탄핵 역풍’으로 인해 그 해 4ㆍ15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원내 1당 자리를 우리당에 내 줘야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과반 여당인 우리당이 국가보안법 개정안 등 이른바 4대 입법을 강력히 밀어붙이다 한나라당의 저지로 법안 처리에도 실패하고 후폭풍을 겪었다. 당시 4대 입법 처리 실패는 천정배 원내대표 등 지도부 사퇴와 당내 실용ㆍ개혁 논쟁을 불렀다. 이때부터 우리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평가도 있다. 또 2005년 12월 9일에는 우리당이 한나라당과의 몸싸움 끝에 사학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역풍에 시달렸다. 한나라당은 장외투쟁에 나섰고, 사학재단 등 종교계도 ‘날치기’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사학법은 2007년 결국 재개정됐다.

물론 과거의 역풍이 이번에도 재연될지는 미지수다. 한나라당은 “지금 추진하는 법안들은 극단적 이념 대결을 불렀던 법안들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말도 한다. 아울러 99년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법안 단독 처리에서 보듯 집권 초기 일을 하기 위한 법안 처리는 큰 역풍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에는 노동법 날치기 처리와 탄핵 때의 역풍 사례를 들며 강행 처리에 반대하는 신중론도 상당하다. 결국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든, 저든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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