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문필업을 겸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의지나 통찰력, '싸움의 기술' 같은 것이지, 문장력이 아니다. 그러나 적잖은 정치인이 책을 내고 떠들썩한 출판기념회를 연다. 대개 자기 홍보용 팸플릿에 가까운 책이다. 제 '화려한' 이력을 과장해서 기록하고 있는 그 책들을 그 '바쁜' 정치인이 직접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정치인이 제 이름으로 내는 책을 꼭 제 손끝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알갱이가 자신의 생각이어야 함은 엄연하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자서전들'을 들추다 보면, 이건 완전한 대필이구나 하고 짐작하게 하는 대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
나는, 다른 전문직 종사자처럼, 정치인들도 힘닿는 한 책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 이력을 화사하게 포장한 자서전류 말고(그런 자서전류는 은퇴한 뒤에나 쓸 일이다), 제 정치적 비전과 야심을 드러내는 책 말이다. 그러나 그런 책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지식인 출신의 정치인들도, 정치판에 일단 발을 들여놓고 나면, 집필과는 담을 쌓는 것 같다.
예외 하나가 언뜻 떠오른다. 한국과 영국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교수생활을 하다 정계로 들어간 사람이 새 천년 들머리에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 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은 뒤,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그 책을 학자로서 쓴 것인지 정치인으로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텍스트의 밀도는 저자의 미끈한 교육배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진보적>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을 여기저기 파헤쳐 놓은 듯한 그 책은 외적 일관성도 없었다. 그가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당시 김대중 정권의 노선과 매우 닮았는데도, 그는 김 정권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했다. 그가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는 표지인지도 모른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를 실천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저자는 그 때나 지금이나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보수주의자'다. 제3의>
최근에 또 다른 정치인이 쓴 책을 읽었다. 표제는 <한국의 내일을 말하다> . 저자는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가 네 해 만에 국회로 돌아온 3선의원이다. 그는 낙선 이후 미국에 얼마간 머무르며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학을 공부했는데, 그 때 이런저런 세미나에서 발표한 발제문들도 끼어 있다. 이 책 텍스트의 전부가 토씨 하나까지 저자의 손가락 끝에서 나왔다는 확신은 없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 이후 사정까지 다루고 있는 걸 보면, 아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한국의>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저자가 표지에 이름이 박힌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며 그가 주변에서 받은 도움이 (있었다고 해도) 그리 크지는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다. 우선 이 책은 그가 정치활동을 하며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한반도와 동북아의 갈등 해소를 꾀하는 데 텍스트의 반 이상을 배당하고 있다.
나머지는 작년부터 한국인 대부분의 관심사가 된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에 대한 견해의 피력이다. 저자가 직업적 국제정치학자나 경제학자가 아니어서 서술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외려 그 점이 더 미덥다. (그 꺼끌꺼끌한 문장들은 한국 법조인들의 악명 높은 글 솜씨를 연상시킨다. 이 책의 저자는 법조인 출신이다).
한국 리버럴리즘의 최대치
참여정부 다섯 해를 거치면서, 이 책 저자와 가까운 정파에 대해 나는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논지엔 대체로 수긍이 간다. 그것은 한국의 '리버럴한' 정치인이 지닐 수 있는 전망의 최대치를 드러내고 있다. 궁리와 공부를 통해 책으로 자신의 비전을 널리 털어놓는 관습이 다른 정치인들에게도 퍼졌으면 좋겠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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