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5일→15일→20일.’
국회법은 상임위에 법안이 회부되면 일정 기간이 지나야만 법안을 상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59조). 앞의 수치는 1991년 국회법에 처음 이런 조항이 생긴 뒤 몇 차례 법 개정에 따라 그 경과기간이 점차 늘어 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지금은 제정법안의 경우 상임위 회부 이후 20일이 지나야 상정이 가능하다. 또 모든 법안이 거치는 법사위에서도 5일이 지나야 심사할 수 있다.
이런 경과기간 조항은 ‘국회=통법부(通法府)’라는 과거의 오명을 씻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물론 ‘긴급하고 불가피한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를 예외로 두고 있지만 하루 만에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까지 통과되는 졸속심사를 막고 소수당을 보호하자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야가 사생결단식 법안전쟁을 벌이는 지금, 의회주의의 품격을 높여야 한다는 이런 정신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현재 논란이 되는 것은 한나라당이 21일 공개한 중점법안 114개 가운데 야권이 강력 반발하는 대략 30개 법안으로 압축된다.
이들 법안은 그동안 여야의 정치적 공방이 있었을 뿐 제대로 된 법안심사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ㆍ방송 겸업 허용, 재벌의 방송시장 진출규제 완화를 골자로 한 미디어 관련법, 사이버모독죄 신설을 담은 전기통신사업자법 등이 제출된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의 경우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법안이 상정되지 않았다. 25일까지 야당과 시한부 협상을 하되 연내 처리를 목표로 삼은 여당의 계획대로라면 26, 29, 30, 31일 등 나흘 안에 상임위 상정부터 본회의 표결까지 모든 절차를 마쳐야 한다. 기존 미디어업계나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한데도 변변한 공청회 한 번 없이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다른 상임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114개 법안 가운데 상당수는 상정조차 안 된 상태다. 또 환경노동위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법안심사소위를 구성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원인에 대해선 양당이 책임 떠넘기기를 하고 있다. 민주당은 “쟁점법안을 군사작전식으로 밀어붙이는 건 의회독재”라고 상임위 점거를 정당화하고, 한나라당은 “심사 자체를 원천 봉쇄해 시간을 보내면서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정치공세”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론 집권여당이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야당은 야당대로 극한 투쟁으로 맞서는 후진적 정치문화에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대통령제 하에선 국회를 국정의 한 축으로 존중해 줘야 원내에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데 이명박 대통령이 의회에 지시하는 식으로 가다 보니 국회의원이 행정부의 거수기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4년 전 열린우리당이 4대개혁 입법을 밀어붙였다가 실패한 경험이 똑같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여야가 이젠 입법과 예산심사란 국회 고유의 기능을 재정립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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