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있어도 열불이 나고 낯이 뜨거워진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회의장 점거와 봉쇄, 해머와 전기톱, 소화기, 육탄전…. 이 정도로도 보통 사람의 상상력을 넘는데, 앞으로 중장비나 무기가 동원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아수라장’, ‘입법전쟁’이란 말도 나오고,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아 이번 주에 최대 고비를 맞으리라는 전망이다.
‘조폭 전쟁’ 닮은 난장판 국회
그러나 무슨 조폭도 아니고 철천지 원수들끼리 사생결단하는 것도 아닐진대, 우리 국회의원들은 어찌하여 이러는가. 남들이 코웃음 치며 경제성장과는 양립할 수 없다던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는데,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에겐 민주주의가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이토록 거칠고 황폐한 꼴을 보였으니 한국이 자랑하던 민주주의의 수준이 그 정도냐, 폭도들의 민주주의 아니냐고 하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세계인들의 기억이 살아 있는 한,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가, 세계 금융위기의 극복을 위해 일익을 맡겠다고 나선 나라가 그런 꼴을 보였으니, 이제 어디 말발이 서겠는가.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나 위신이 끝없이 추락한 2008년 12월 19일, 그 야만의 날을 국치일, ‘국회 치욕의 날’이라고 부르고 두고두고 기억하며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누가 제공했고 누가 옳았는지, 따지고 싶지 않다. 야당의 비협조나 여당 상임위원장의 질서유지권 발동, 한미 FTA 비준동의안 상정의 옳고 그름을 둘러싸고 여야가 벌이는 비방전에도 관심이 없다. 이 시점 국민의 눈에는 국회도, 집권당이나 야당 어느 누구도 없다. 그렇게도 ‘언제나 나만 옳다’던 그 누구의 변명도 들리지 않는다.
10년 전 외환 위기의 악몽이 너울거리고 민생이 도탄에 빠진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국회와 정부가 무언가 신속하고 활발하게 움직여서 대책을 만들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기대했었다. 이를테면 국민이 뽑은 ‘정부’가 맡은 바 제 임무를 다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게 뭔가. 수치스럽고 절망적이다. 국민의 상처와 시름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정작 국회야말로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을 깎아 먹는 망국적 존재가 되지 않았는가, 할 말이 있는가.
국회의 행정부 견제 등 본연의 기능 회복, 대화와 토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민주주의 훈련의 강화, 원내교섭단체 대표 중심의 운영방식 개선, 낙천ㆍ낙선 운동 등 유권자 저항운동의 제도화, 국회윤리위의 강화 등등, 갖가지 대안들이 나오지만, 그 어떤 대책도, 논쟁과 진실규명도 국회의원, 여당과 야당, 스스로가 바뀌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건 단 하나, 여야 모두가 일체의 공격, 비방 행동을 중지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하는 것뿐이다. 앞으로 국회에서 더 이상 폭력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이를 어길 경우 국회의원 자리를 내놓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필요하다.
국가적 치욕 깊이 반성해야
그렇지 않아도 입법권자를 자부하는 국회의원들의 법의식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이유 있는 의문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 대표, 선량이라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물리적 충돌을 불사하고 심지어 폭력에 호소하는, 비행청소년보다도 못한 모습을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어느 의원과 보좌관 개개인의 행동만이 아니라 난장판을 벌인 국회 전체, 국회의원 전원을 탄핵하고 싶은 게 사태를 보는 국민의 울혈진 심정이라는 것을 깊이 헤아리기 바란다. 막장, 바닥까지 온 입법전쟁, 민의의 전당을 더럽히는 국회의원들의 폭력을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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