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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9> 신성일·엄앵란의 독특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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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9> 신성일·엄앵란의 독특한 사랑

입력
2008.12.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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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보다 더 잘 생겼다는 말을 하는 것은 대체로 어색한 일 이다. 그러나 연예인 스타에게는 그런 비교가 가능하다. 미남이나 미녀의 기준을 연예인으로 삼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비교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정도는 객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자기 혼자 "난, 잘 생겼을 뿐이고!"라고 주장해봐야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신성일은 미남이다. 처음 영화에 데뷔했을 때 깨끗하고 깎아 놓은 듯이 잘 생긴 얼굴을 보고 모두들 놀랐다. 1960년'로맨스 빠빠'라는 영화였다. 지금 같으면 '파파'라고 했을 테지만 그 당시 식으로 '빠빠'라고 했다. 이 영화는 보험회사 사원이던 김승호가 감원 당하면서 벌어지는 홈드라마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 제작을 한 신 필름 작품으로 김진규 최은희 허장강 등이 출연을 하고 신성일이 이 영화로 데뷔했다. 신 감독은 신 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차리고 배우를 모집했는데 그 때 픽업된 배우가 신성일이다. 고향이 대구인'강신영'이라는 23살 젊은 배우(1937년생임)는 신 필름이 배출한 첫 번째 '별(스타)'이라는 뜻으로 신 감독으로부터'신성일'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그 이름은 훗날 그의 본명이 된다.

어느 나라든지 한 시대를 풍미하는 스타가 있다. 60년대 이후 신성일은 분명히 스타들의 중심에 있다. 요새 인기 있는 배우들과 비교한다면 실례가 될까? 장동건, 배용준, 조인성? 모두 다 훌륭하고 잘 생긴 배우들이긴 하지만 신성일과는 다른 면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년에 영화가 300편씩이나 제작되던 6,70년대에 신성일이 출연하지 않은 작품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자니 하루 종일, 때로는 밤새도록 겹치기 출연을 해야 했다.

많은 영화 중에서도 '맨발의 청춘'과 '동백 아가씨'는 그의 운명을 바꿔 놓는 작품이 된다. 엄앵란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엄앵란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건강한 아름다움에 더해 솔직하고 발랄한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둘 사이가 깊어지던 어느 날 연애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된다.

1964년 서울의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3~4,000천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나라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혼을 한 이후로도 신성일의 인기에는 변화가 없었다. 꾸준히 영화 촬영을 했다. 그러나 잘 생긴 그를 주변에서 내버려두질 않았던 모양이다. 엄앵란은 남편에 대해"잘 생긴 남편과 살려면 각오를 해야죠. 하지만 속이 많이 상해요"라고 증언한다.

엄앵란은 서울 토박이다. 부친이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연주했고, 또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인 엄토미씨가 그녀의 삼촌이다. 어머니 노재신 여사는 애초에 무용을 하다가 배우가 되어서 많은 영화에 출연을 했다. 예술가 집안인 것이다. 그녀의 본명은 '엄인기', 남자 이름 비슷하다.

스무 살 때 '단종애사'(감독 전창근)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배우로서의 삶보다 신성일의 아내로서의 삶 속에서 수많은 아픔과 기쁨을 겪어야 했다. "위험할 때도 많았죠. 근데 잘 버티니까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TV에 출연해서 대담하는 엄앵란이나 사석에서 얘기 나누는 엄앵란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것이 그녀의 매력이다. 그냥 똑 같다.

그녀는 나를 부를 때 "증 선생"이라고 한다. 서울 사람들은 '정'을 '증'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신성일은 나를 '의리 친구'라고 부른다. 이유가 있다.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을 한적이 있는데 이름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투표용지에 '신성일'이 없어서 유권자들이 찍고 싶어도 찍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본명은 '강신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성은 살리고 이름을 바꿔 '강신성일'을 본명으로 한 뒤 대구에서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어느 날, 강신성일 의원이 전화를 했다. 후원의 밤 행사를 해야 하는데, 야당(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라서 여기저기 축사를 부탁해도 거절을 당하니 내가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출연한 영화를 수없이 연출한 모 영화감독조차도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고 그런지 축사를 거절했다고 한다. 나는 선뜻 승낙을 했다.

그리고 의원회관 대강당 무대에 올라가 강신성일 의원의 인간성에 대해 스피치를 했다. 그것이 고마웠던 모양이다. 가까운 사람, 믿었던 사람들이 얼굴 돌릴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이 고마울 수는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만날 때마다 '의리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다. 이 다음에 만날 때는 그냥 '친구'라고 부르기를 권해야겠다.

요즘 그는 매우 행복할 것이다. 부인인 엄앵란 여사가 영화瓦?시절보다 더 바쁘고 돈도 잘 벌뿐만 아니라 여전히 건강하다. 또 아들인 영화배우 강석현의 일이 잘 풀려가고 있고, 본인 자신은 고향인 대구에서 가까운 경북 영천에 한옥으로 멋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사람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아마도 그 보금자리에 사랑방 형태의 '작은 낙원'을 만들 것으로 짐작된다. 한때는 미국 뉴욕에 배우학교를 차려서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 자녀들 중 소질 있는 젊은이들을 발탁하겠다는 기획을 해서 몇 차례 현지를 다녀오기도 했는데 지금 이 구상을 접었는지, 아니면 아직 계속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들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신성일은 젊은 시절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우왕좌왕하며 가슴 아프게 만들던 남편, 정치를 한다고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던 남편, 심지어 옥살이까지 한 남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기를 살린다며 항상 따뜻한 온돌 노릇을 해왔다. 그런 엄앵란 여사에게 강신성일씨는 "나는 빚쟁이"라는 말로 위로를 대신한다. 그럴 때 그녀는 "빚은 벌써 다 탕감했다우"라며 왈왈 웃는다. 부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참으로 '독특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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