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으고오~, 마악고~, 피해서 베요. 돌면서 베요."
17일 오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성. 막자란 풀과 돌 사이로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여자배우가 눈에 잡힌다. 보랏빛 갑옷에 오른손엔 칼, 왼손엔 화살을 쥔 모습이 영락없이 고려 무사다. 내년 1월 방영 예정인 KBS 사극 '천추태후'의 촬영 현장에서 만난 배우 채시라(40)의 모습이다
이날 촬영은 18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돼 궁에서 쫓겨난 고려 5대 왕 경종의 셋째 왕비 헌애왕후(왕건의 손녀로 훗날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른 후 천추태후로 등극)가 지금의 함경도 지방으로 와 발해 유민과 합심, 북방의 성을 쌓다 여진군의 침략을 받는 장면. 전투 신에 임하는 헌애왕후 역 채시라의 날렵하고 담대한 모습을 담는 날이다.
드라마 속 천추태후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사랑 싸움을 하거나 치열한 권력 암투를 벌이는 조선시대의 왕후 같은 모습이 아니다. 직접 성을 쌓고 칼을 들어 적을 베고 말을 달려 활을 쏘는 여장부이자, 목숨을 건 사랑을 하는 지고지순한 여인이고, 병약한 아들에 번뇌하는 여느 어머니이며, 그 모든 것에 앞서 나라를 생각하는 고려의 딸이다.
"기존 사극은 남성 중심적인 작품이 많았잖아요. 여성은 조금씩 지나가듯 살짝 보여주거나, 거의 투기하고 싸움하고 이런 모습으로 나왔으니까. '천추태후'는 달라요. 당시는 여성이 자유로웠던 시대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현대와 비슷해요. 요즘엔 딸도 알파걸로 키우고 싶어하고, 골드미스라고 결혼하지 않고 사회생활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잖아요."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 에서 천추태후는 외척 김치양과 통정해 낳은 자식을 왕위에 앉히고자 궁에 불을 지른 음탕한 여자, 권력욕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고려사>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중국 사대 흐름에 맞서 자주를 부르짖은 희대의 여걸, 12년의 섭정기간 동안 실리외교로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오고 서경(평양)을 기반으로 태조 왕건의 북방 영토 확장의 꿈을 좇은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으로 재해석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자식조차도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버릴 수밖에 없는, 남자도 갖기 어려운 기개를 가진 여자죠. 유교적 잣대에서는 좋게 보일 리가 없지만 천추태후가 재평가받아야 한다는 학자들도 있고 저희 생각도 그래요."
채시라는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 '왕과 비'의 인수대비, '해신'의 자미부인 역 등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카리스마 있고 선이 굵은 역을 많이 해왔다.
"채니 아빠(남편 김태욱)가 그러는데 제가 아기자기한 드라마보다는 스케일이 큰 게 더 어울린대요. 글쎄, 덩치가 커서 그런가.(웃음) 제가 현대물, 사극 고루 다 해본 편인데 사극을 했을 때 빛이 난다는 얘기를 들어요. 어쨌든 어울린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니까."
채시라는 프로로서 욕심도 많고 근성도 있고 오기도 있다고 했다. 액션 연기도 그렇다. 5월 말부터 액션스쿨에서 하루 평균 3시간씩 연습에 몰두했다. 첫 액션 연기 도전을 위해서다.
"아무래도 극한 상황에서 사람을 찌르고 죽이는 거니까, 인상을 많이 쓰게 되고 기합을 넣어야 하고 악을 질러야지 힘이 나오는 거 같아요. 액션 땐 다른 종류의 연기 감정이 필요하더라구요. 연습할 땐 잘 몰랐었는데 막상 첫 촬영을 하니까 감이 잡혀요."
전쟁 신이 많은 만큼 부상도 잦다. 채시라는 얼마 전 말에서 떨어져 골절상을 입었다. "다친 거요? 말도 마세요. 말에서 떨어져서 엉덩이뼈에 금이 가고, 물에 빠지는 신 때문에 지난달엔 후두염에 걸려서 꼼짝도 못했어요. 뭐 사소하게 칼에 부딪치고 멍들고 까지고 이런 건 늘 있는 일이에요. 김태욱씨가 '아내가 군대 갔다'고 그래요."
원칙을 고집하는 채시라의 단단한 성격은 육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갓 돌이 지난 아들의 모유 수유를 위해 한 달 전까지 촬영장에서 젖을 짜 얼려놓았다가 집으로 공수했다.
"아이에게는 모유가 좋잖아요. 저는 뭐가 좋다고 하면 머리 속으로만 그렇구나 하고 마는 성격이 아니라 '그래 얼마나 좋은가 나도 한 번 해보자' 그렇게 실천해보는 스타일이에요." 신창석 PD는 그런 채시라에게 '수퍼맘'이라는 호칭을 붙여줬다.
채시라는 배우로서 자신의 장점을 '성실함'이라고 꼽았다. "광고모델부터 시작했는데 드라마 처음 할 때도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대로 열심히 했어요. 그러다보니 결과가 좋고, 결과가 좋으니까 '아 열심히 하니 잘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저는 갑자기 뜬 게 아니라 차근차근 된 거 같아요. '샴푸의 요정' '여명의 눈동자' '아들과 딸' 같은 좋은 작품도 만났으니 운도 참 좋았죠?"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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