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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할마씨들의 지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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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할마씨들의 지혜 공동체

입력
2008.12.17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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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두어 달에 한 번 꼴로 여행을 가신다. 한 달에 쓰레기봉투 1장도 안 쓰시는 양반이 지갑을 연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니 적게 잡아도 60년 지기들이다. 각 가족 모임에서 당신들 엄마의 삶의 질이 제일 높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단다.

여러 해를 지켜보니 여기도 대목이 있다. 어버이날과 추석 다음은 좀 큰 판으로 가시고 사이사이에는 소소하게 노신다. 일정은 2박 3일이 3박 4일 되기 일쑤다.

이 분들을 모시고 다니는 단골 승합차 기사분만 두 분이다. 행선지에 따라 때로는 남도에서, 아니면 중부에서 합류하신다. 지역 사정을 꿰고 계시는 기사님들의 안내를 받아 최상의 관광 자원을 찾아 철철이 풍광 좋고 경계 좋고 구경거리 많은 곳들로 다니신다.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계시는 이분들의 정보 네트워크와 인맥은 전국구다. 뉘 집 자녀는 산림청 관계자니까 자연휴양림에서 최대한 합법적으로 편의를 제공받는다. 또 뉘 집 손주가 찜질방을 열었다면 당연히 숙박은 거기서 해결하신다. 지난번에 오라버니네 전원주택에 가셔서는 출장으로 부재한 주인 아쉬울 것도 없이 세 끼 잘해 드시고 택시 대절해서 부근 명소들을 돌아다니셨다.

한 분은 당신 집에서 가져온 상추씨며 배추씨며 그 집 텃밭에 뿌리고 냉장고 안에서 싹 내고 있는 감자도 묻고 나오셔서 돌아온 집주인이 여름 철 내내 수확해 드셨다 한다.

어머니 짐 보따리는 항상 차 있다. 이분들이 뜨시니 지역 유지인 사돈네 팔촌까지 나서서 싸주는 말린 표고버섯이며 감이며 꼭 가져오신다. 이 모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하던 한 분이 책임 선에서 물러나 떡고물을 챙길 수 없게 된 아쉬움을 지역 장터에서 달래기도 하신다.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셨는지 여쭈어 보면 레퍼토리가 별반 차이가 없다. 한 열 댓 번은 들은 얘기들이다. 대표작을 꼽자면 한문선생 얘기가 있다. 한문을 잘하셨던 어머니에게 선생님이 호(好) 자를 풀어보라고 했더니 "계집과 사내가 서로 좋아하는 거요"라고 얼굴 붉히며 대답하고 동무들이 와 하고 웃었다는 얘기, 또 몰(말)만한 계집애들이 복도에서 손들고 벌 선 얘기 등이다. 소싯적에 반장했던 분은 지금도 여전히 지도력을 발휘하고 계시고.

금기는 잘난 자식 자랑하지 않기. 며느리 흉보지 않기, 친정부모 잘 사시던 얘기 하지 않기 등이다. 정치·경제.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도 많았지만, 누구 모강지를 뚝 끊어놓아야 한다는 격한 언설이 등장한 후로는 그 동네 얘기 별로 안 하신단다. 또 하나 종교 전도하지 않기. 각종 불문율이 많이 생기다 보니 옛 시절 풍경들이 단골 놀이 감이다. 무엇이 이 모임을 유지하게 하는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마도 세월 속에 다져진 이런 지혜로움 덕분인 듯하다. 만나면 동요만 부르는 백익무해한 무공해 에너지 충전소 7학년 모임.

어머니가 또 여행을 떠나신다 했기에 전날 문안 전화를 드렸다. 큰 소리로 웃으시며 모레를 내일로 착각하셨다 한다. 마음은 벌써 콩밭에 가 계신 거다. 여행을 마치고 헤어지는 대목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살지 아무도 모르니 한 번이라도 더 만나야 한다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 약속을 잡을 것임을 나는 안다.

어머니 말씀이 집안에 노인이 둘이면 서로 먼저 가시라고 양보하면서 죽어도 먼저 안 죽는다 하신다. 이렇듯 짱짱하고 건강 경쟁하는 어르신이 열이나 되는 이 공동체는 겁나게 위력적이다. 이 할마씨들은 서로 담합하여 예순 아홉에서 나이 먹는 것을 멈추었다 한다. 뭔들 못하실까.

윤혜린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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