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들은 사물에 보이지 않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어 특정한 동물이나 물건을 숭배하였다. 이러한 주술적 사유는 현대인의 마음속에도 암암리에 깃들여 있다. 오랜 세월 타고 다녔던 차를 중고차 시장이나 폐차장으로 떠나보낼 때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차디찬 고철 덩어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슨 살아있는 생물체에 대한 애틋한 감정 비슷한 것임을 알 만한 사람은 안다.
학자들의 책에 대한 심정 역시 이처럼 각별하리라. 나의 경우 조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재서(在書)'이니 그야말로 책에서 존재의의를 찾아야 할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나는 책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신변에 책이 없으면 웬지 모르게 불안해진다. 종교학의 대가 엘리아데는 만년에 서재에 화재가 나서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났고, 잘 아는 교수 한 분은 최근 연구실에 불이 난 후 우울증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절망스러운 심사를 충분히 이해할 것만 같다.
하지만 분신같이 소중한 책을 나는 평소에 정돈해 놓지 않는다. 다른 물건들은 그렇지 않지만 책만큼은 아무렇게나 놓아도 멋있기 때문이다. 책은 주변에 의지해서 멋있게 보이는 존재물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의 결정체로서 스스로 발하는 아우라에 의해 혼자서도 충분히 아름답다.
책과 나 사이에 모종의 은밀한 교감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은 광대한 도서관이나 분류가 안 된 서재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이다. 신기하게도 내가 염두에 둔 책이 '나 여기 있소' 하듯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실제로 나에겐 힘들여 책을 찾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어떤 이는 이런 경우를 두고 도서관에 천사가 있어서 도와준다고 재미있게 말하기도 한다.
독서광이었던 바슐라르는 매일 독서의 신께 기도를 드렸다고 하니 이쯤 되면 책은 신앙의 대상이다. 나도 바슐라르를 좇아 이렇게 기구(祈求)해 본다. "오늘도 일용할 책을 주옵시고…"
정재서 이화여대교수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