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쯤 돈이 들어올 예정이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이소.”
“오늘 현금이 안되면 어음이라도 끊어주세요. 빈손으로는 두 달째 월급 못 주고 있는 직원들 낯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참…. 누가 돈을 떼묵는다캅니까. 시간을 좀 달라는 거지예.”
“두 달이나 연락이 안돼서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저도 그냥 못갑니다!”
9일 경남 거제의 한 지방건설업체 사장실. 경기 일산에서 토목공사업체를 운영하는 박창수(가명ㆍ36) 사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업체 하청을 받아 주택부지 조성공사를 마쳤지만 넉 달이 지나도록 공사비 잔금 3,800만원을 받지 못하자 이날 아침 작심하고 핸들을 잡은 터였다. 일산에서 5시간 반을 달려 이곳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반.
1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만난 원청업체 사장은 ‘죽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돈을 줘야 할 사람도, 돈을 받아야 할 사람도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었다. 1시간쯤 더 지났을까. 박 사장은 결국 빈손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때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도로변의 한 해물탕집. 삼성중공업 등 세계 굴지의 조선소들이 모여 불황이라고는 모를 것 같던 거제에도, 불황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요새 손님이 통 없심더. 손님이 오늘 세 번째라예.” 내년이면 10년이 된다는 식당 주인은 “요즘처럼 장사가 안 되는 때는 없었다”고 했다.
다음 목적지는 전북 고창. 박 사장 회사에 자재(옹벽용 블록)를 납품하는 하청업체가 있는 곳이다. 당장 금전관계는 없지만 기왕 지방에 내려온 김에,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온 협력업체 사장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할 참이었다.
박 사장은 “큰 건설사가 기침을 하면 하청업체는 앓아 눕는다”고 했다. 사실 정부도 언론도 대형 건설업체들의 자금난만을 주목하고 있지만, 대형사 아래에 딸린 수백개 하청ㆍ재하청 영세 업체들은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서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공사 10건 중 미수가 1, 2건이던 게 8월부터는 6, 7건으로 급증했다. 관급공사를 맡아야 그나마 제때 돈을 받을까, 민간공사는 대부분 미수와 연체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오늘 그 업체 사장이 야속하게 볼지 몰라도 저도 살아야죠. 요즘은 한 달 중 보름이 이런 밀린 돈 받으러 다니는 출장이네요. 하기야 일감도 없으니….”
컴컴한 길을 3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고창. 블록공장 사장도 한숨만 토해냈다. “주문 줄었지, 나간 자재 대금 회수 안되지…. 요즘 돈 받으러 댕기는 게 일이 됐당게요.”
하청업체로부터 재하청을 받아 돌아가는 공장. 얼마나 어렵겠는가. 박 사장은 “하청 업체의 고통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굶는 한이 있어도 내가 하청 준 업체에 결제를 미루는 일은 없다”고 했다.
숙소로 가는 길. 박 사장은 대뜸 “미수금만 회수되면 아예 사업을 접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했다. 허리 휘도록 일을 해줘도 돈이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에 돈 갖다 준 게 언제인지도 기억에 없다.
“내일 찾아갈 충남 서산 일은 정말 걱정입니다. 원청업체 부도로 1억2,000만원을 날리게 생겼어요. 일단 만나 얘기를 들어보는 수 밖에요.”
축 처진 박 사장의 어깨가 언제쯤 활짝 펴질 수 있을는지. 과연 그 때까지 버틸 수는 있을는지. 박 사장에게 희망의 빛은 보이질 않았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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