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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건 몸과 옥탑방 보증금뿐… 모든 걸 주고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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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건 몸과 옥탑방 보증금뿐… 모든 걸 주고 떠나다

입력
2008.12.0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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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외로운 육신과 그 몸을 뉘던 옥탑방의 월세 보증금. 한국전쟁 때 고향 신의주에서 혈혈단신 월남해 평생 홀로 살아온 가난한 노인이 삶의 막바지에 그가 가졌던 모든 것을 내놓고 한 많은 이 세상 소풍을 끝냈다.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사무실에 우편물 한 통이 배달됐다. 김문진(68)씨 명의의 장기기증 등록증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눌러 쓴 편지 1장이 들어있었다.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나려 합니다. 저의 시신 중 모든 부분은 장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증해 주십시오." 집세 보증금 중 300만원을 받아가라는 내용도 있었다.

깜짝 놀란 이원균 사무국장이 서류를 뒤져 김씨 인적사항을 확인하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강동구청이었다. 구청 직원은 "구청에도 죽음을 알리고 보증금 처리를 부탁하는 김씨의 편지가 배달돼 경찰에 신고했다"고 했다.

같은 시각, 강동구 암사동의 5층 옥탑방에 출동한 경찰은 목을 맨 채 싸늘한 식은 김씨의 주검을 발견했다. 사망추정시간은 3일 오후 6시 이후. 김씨는 이날 장기기증본부와 구청에 등기로 '유서'를 보낸 뒤 집에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고인의 마지막 바람인 장기기증은 이뤄지지 못했다. 기증이 가능한 사후 6시간을 넘겨 시신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따르면 혼자 월남한 김씨는 서울의 모 대학을 중퇴하고 건설업에 뛰어들어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20여 년 전 연대보증을 잘못 섰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사글세 방을 전전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던 김씨는 최근 언젠가 만나리라 고대했던 북녘의 일곱 살 위 형님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숨지기 전 김씨의 한 달 수입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주는 월 34만8,000원과 노령연금 8만4,000원이 전부였다. 월세 20만원을 내고 나면 입고 먹기도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2005년 장기기증본부에 장기기증을 약속하고는 매달 후원금 5,000원도 꼬박꼬박 보냈다.

김씨는 자신의 죽음이 행여 주위 사람들에게 누를 끼칠까 싶어 구청에 보낸 편지에서 뒷마무리를 부탁했다. 보증금 500만원 중 300만원은 장기기증본부에 보내고, 이달치 월세 20만원을 뺀 나머지 180만원은 자신의 유품을 정리하는데 써달라는 것.

소식을 접한 이웃들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했던, 점잖은 할아버지"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했다.

암사1동 주민센터 직원 김현정(33ㆍ여)씨는 이런 사연을 전했다. "지난달 17일 독거노인들에게 지원하는 쌀 20㎏ 1포대와 라면 1박스를 들고 찾아 뵈었는데, 할아버지는 끝내 받지 않으셨어요. '나는 아직 몸 움직이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으니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며. (비상시에 대비해) 지인 연락처를 알려달라 해도 '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거절하던 분이었어요."

김씨가 살던 건물 1층의 문구점 여주인 장모씨는 "외출할 땐 늘 짙은 감색 양복을 단정하게 다려 입고 다녔다"면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말수도 적었지만 인사 드리면 반갑게 받아 주셨는데, 너무 허망하게 가셨다"고 말했다. 집주인 최모씨도 "지금까지 한 번도 월세나 공과금을 밀린 적이 없었던 분이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박진탁 장기기증본부장은 "고인의 뜻을 기려 시신을 고려대 의대 해부학교실에 기증하고, 유산 300만원은 장기부전 환자들을 위해 뜻 깊게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본부는 5일 오후 고려대 안암병원에 빈소를 마련했으며, 6일 조촐한 장례의식을 치른 뒤 시신을 기증할 예정이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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