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4월. 영화<태> 가 명보극장에 걸리던 날이다. 광고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나 첫 회부터 관객이 몰려왔다. 을지로 3가 쪽으로 뻗은 줄이 대략 500명은 되어보였다. 첫날 첫회 관객으로는 괜찮은 편이었다. 영화가 돌아가는 동안 장내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돌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가는 관객들의 표정이 매우 무거웠다. 태>
고개를 숙이고 가는 사람, 극장 앞에 서서 묵묵히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 발걸음이 무겁게 하나 둘 사라졌다. 2회가 곧 시작되는데 매표소 앞이 텅텅 비어있었다. 첫 회 스코어로 보면 2회는 800명 이상이고, 3회부터 매진인데... 매표소 창구 여직원에게 몇 장 나갔느냐고 물었다. 여직원이 머뭇거렸다. “15장이요.” 아찔했다. 기도주임이 눈짓으로 불렀다.
그는 10여 년간을 명보극장에서 근무하여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극장 한 구석에서 그가 나의 시선을 극장 앞에서 서성거리는 젊은이들을 향하게 하였다. “저 사람들, 사복경찰들이야.” 내 눈이 동그래졌다. 급히 극장 앞으로 나갔다. 주변을 살폈다. 100미터 주변, 사복한 경찰이 쫘_악 깔려 명보극장 쪽으로 오는 젊은이들을 무단 검문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극장 쪽을 피해 돌아가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공연윤리위원장 L씨는 정부를 대신하여 갖은 방법으로 나에게 영화개봉 포기를 권했었다. 문공부예술국장 C씨는 원작과 다르다며 영화사 행정제재를 거론하며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요원들은 해외친척, 스탭들의 신원ㆍ성분 조회 결과를 내세워 영화개봉의 자진 취하를 요구하였다.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광고심의를 보류시켜 일체의 광고를 할 수 없게 하여 빠른 종영을 유도하였다. 극장주 역시 그들 눈에 벗어나지 않게 초대권 발급을 제한시켰다. 멀리 남산 중앙정보부 건물이 보였다. 기도주임이 귓속말을 하였다. “첫 회, 초대권 빼고 거의가 중부경찰서에서 깔아 놓은 사복경찰들이었어.”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극장 문을 열고 나섰다.
경찰들도 내가 돌아가 주면 자기들도 일찍 해산하고 편히 쉴 수 있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발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산을 넘어 한강 다리 위를 걷기 시작하였다. 한강은 언제나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나의 패배의 이정(里程)이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듯하였다. 갈 곳이 막연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또 패배하였는가.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갔다. 텅 빈 사무실. 전화벨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전화선을 뺐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한참을 잤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 아무에게도 나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앞 일이 캄캄하였다. “안녕하세요.” 이때 노크를 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C일보의 정중헌 기자였다. 마침 ‘신문의 날’이라 모든 기자들이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충무로 안팎으로 들리는 흉흉한 소문에 기자 시사회도 없이 개봉했는데 그가 극장으로 달려가 영화를 본 것이었다. 특종을 잡으려는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 동안의 숨은 이야기를 캐내려 했지만 나의 신조는 변함이 없었다. 정부와의 대립을 화제로 영화를 흥행시키겠다는 생각은 위기의 순간까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영화를 잘 못 만들어서 그렇죠.”
그 다음날 아침 C일보 조간 문화면, 한 페이지가 <태> 의 영화평, 관객평으로 도배되었다. ‘하명중, 그는 이 사회에 무엇인가를 영화에서 말하려 하였다. 그러나 관객은 냉담했다.’ 빈 객석에 대하여 애석함을 애절하게 썼다. 그 날 한 식당에서 아내와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몇 테이블 건너에서 한 부부가 낮게 언쟁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 대한 이야기로 언쟁을 하는 것이었다. 부인이 남편에게 조간신문에 난 기사를 펼쳐 보이며 ‘이 영화를 꼭 보러 갔어야 한다.’고 했다. 태>
그녀는 ‘보러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목이 메었다. 조용히 그분들 곁으로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저, 괜찮아요.”그 분들은 내 손을 잡았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우리 부부 식사 값까지 내주며 그들은 종영되기 전에 봐야 한다며 극장으로 달려갔다. 영화간판이 며칠 만에 내려지고 나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자동차 문짝이 떨어져 핸들과 문짝 손잡이를 비닐 끈으로 묶고 다닌 지가 몇 개월이 흘렀다.
영화를 다시 만들고 살길을 찾아야 했다. 돈이 필요하다. 아는 것은 ‘영화’ 뿐. <본격적으로 영화사업을 해보자> 는 결심을 했다. 영화제작에 실패한 나로서, 영화수입업으로 돈 벌 계획을 세웠다. 20년 전, ‘홍콩 쇼브라더즈’의 ‘런런쇼’ 회장에게서 세계영화시장에 대한 교육을 받은 실력으로 도전해 볼 만하募?자신감이 있었다. 수입업은 5,000만원의 정부예치금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 동안 3편의 영화제작 실패로 가는 곳마다 장벽을 만났다. 본격적으로>
실물경제와 현실에 대해 ‘젬병’이었던 나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친근하던 사람들마저도 ‘NO’ 였다. 그러나 나는 역시 운이 좋았다. 친인척, 친구마저도 외면하던 내게 은인이 나타난 것이다. 대구 한일극장(현 대구한일시네마)의 연재현 회장이 그였다. 연재현 회장은 선뜻 나에게 5,000만원을 건넸다. 그는 차용증을 쓰려는 내 손을 잡았다. “하 감독님이 그 돈 값어치도 안 돼요? ”
이렇게 시작한 나의 영화수입사업은 훗날 한국대기업이 영화수입사업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86년 5월, 영화<태> 의 참패 후 다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만들어야 한다고 빈손으로 뛰어든 세계영화시장. 나는 20년간 숱한 일화를 만들어 냈다. <플래툰> , <시네마천국> , <패왕별희> , <베어> 등을 앞세운 수많은 흥행기록,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 개관, 최초 예술영화관 설립, 영화티켓전산화, 영화수입세제 국제표준화, 세계영화사 및 세계영화인들과의 인적 기술교류, 국제영화제 진출 등 우리영화와 영화인들의 세계화에 앞장 서 지구를 돌고 돌며, 달리고 달렸다. 베어> 패왕별희> 시네마천국> 플래툰> 태>
그러나 허다한 기록의 첫 프로젝트는 가장 참혹한 패배의 기록으로 시작되었다. 회사 설립 첫 영화가 ‘오페라 영화’였다. 오페라와 뮤지컬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 주연 ‘플라시도 도밍고’,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의 오페라 영화 ‘오델로’를 수입한 것이다. 감독 체면을 다 버리고 영화를 수입하겠다던 내가 또 사고를 친 것이었다. 흥행이 참패하자 모두가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잊었을 뿐이었다.
나는 요즈음 오페라와 뮤지컬이 대중화된 사회를 보며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그 때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여유가 없을 뿐이었다.’ 예술은 대중을 앞서가고, 대중은 예술가에게 꿈을 꾸게 해주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세계의 진실이다. 요즈음 주변이 꽁꽁 얼어붙은 느낌이다. 이럴수록 신나게 춤추고 신나게 노래를 불러보자.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