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을 덮친 위기는 한국은행의 위기이기도 하다. 돈이 돌지 않는 위기에 시중의 시선은 온통 발권력(돈을 찍어내는 힘)을 지닌 중앙은행에 쏠리고 있다. 시장은 연일 "돈을 더 풀라"고 아우성이고, 일각에선 "한은이 너무 몸을 사린다"고 목청을 높인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나서 "한은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상황. 하지만 이들도 역시 한은처럼, 앞뒤 재지 않고 푼 돈이 초래할 부메랑(인플레)을 잘 알고 있다. 과연 한은이 잘 하고 있는 지,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국내 중앙은행 전문가 10인에게 물었다.
"발권력이 '마르지 않는 샘'은 아니다"
금융위기 발생 이후 한국은행이 아주 잘해왔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들은 별로 없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위기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주문도 많았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만능의 해결사는 결코 아니며, 모든 짐을 떠넘기는 것 역시 부당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우선 전문가 10명 중 7명은 '한은이 위기에 너무 소극적이고 뒷북 대응한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돈이 급한) 시장의 비난을 모두 들어줄 수는 없다", "물가안정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비춰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대형 은행이 파산하고 기축통화(달러)를 찍어내는 미국과 대응이 같을 수는 없다" 등의 논리였다. 9명이 지금까지 한은의 대응에 대해 보통(1~5점 중 3점) 이상의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 만한 행동을 했다는 데, 역시 과반수 이상의 전문가가 동의했다. 이를테면, 소극적이고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다 정부와 여론 압박에 마지못해 수용한 채권안정펀드지원과 은행채 매입이 그런 경우. 필요한 조치라면 정부가 요구하기 전에 알아서 먼저 했어야 했고, '정 아니다' 싶으면 끝까지 거부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은이 나서야 할 때"
전문가들은 "한은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설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7명이 "지금은 (상식을 뛰어넘는) 정말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고, 6명은 "앞으로 금리를 더 내리고 돈을 더 풀어야 한다"고 답했다.
정부와 종종 마찰을 빚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해서도 "드러나게 요구하는 정부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향후 1~2년은 독립성을 따질 때가 아니다", "정부가 우선 '위기관리'를 선언한 뒤, 한은의 비상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는 '특별 대응' 주문이 많았다. 김현욱 연구위원은 "정부와 한은의 위기 인식 수위가 다른 것 같다"며 "우선 수시로 만나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가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역할도 환경 변화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송의영 교수는 "물가뿐 아니라 자산가격 및 금융시스템 안정 등 갈수록 중앙은행이 새로 관리해야 할 대상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확대된 역할범위를 법 개정으로 뒷받침할 지, 현 상황에서도 가능한 지에 대해선 의견이 반씩 갈렸다.
"인플레 부메랑, 반드시 막아야"
압도적 다수(9명)가 "현재 풀리고 있는 대량의 유동성이 향후 치명적인 인플레 압력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디플레이션 양상까지 보이는 당분간 물가 염려는 없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불가피한 부메랑이라는 얘기다. 3명은 그래서 "풀더라도 양을 최소화하고 시스템이 흔들릴 때만 제한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경기가 회복기에 들어서면 적절한 시기에 유동성을 다시 흡수해야 하는 한은의 역할이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신용상 실장은 "금리를 올릴 때는 늘 저항이 강하지만 제때 인상을 못하면 또 다시 위기 악순환에 빠질 것"이라며 "어렵겠지만 한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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