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지평선] 전봇대의 눈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지평선] 전봇대의 눈물

입력
2008.12.08 00:08
0 0

이명박 정부에서 전봇대는 한동안 규제의 상징이자 애물단지로 취급됐다. 이 대통령이 1월 18일 인수위 간사회의에서 지난해 목포 대불공단을 방문해 전해 들은 얘기를 소개한 것이 계기였다. "공단 길 건너편 교량에서 대형 선박블록 적재트럭이 커브를 틀 때 (모퉁이에 있는) 전봇대가 방해가 돼 그걸 옮겨 달라고 업체들이 수 차례 요청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안 된다고 하더라. (관련 기관이 책임을 미루니) 폴 하나 옮기는 것도 안 된다. 아마 지금도 안 됐을 거다. 실제로 지방가면 한 번 둘러보려고 한다. 오늘 말했으니 아마 됐을 거야."

▦ 대통령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후 전봇대를 졸속행정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사흘 뒤인 20일 한전이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전봇대를 3m 뒤로 물리는 이설작업을 강행한 까닭이다. 높은 분의 '관심사' 앞에선 감전 위험이 높은 우천 시엔 가급적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내부 관례도 무시됐다. 이를 '씁쓸한 뉴스'라고 소개한 당시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높은 분이 얘기하면 5년 걸릴 일도 5일 만에 해결되는 탁상행정은 끝나야 한다"며 "국가 선진화의 장애물은 길가의 전봇대가 아니라 (공직사회에 만연한) 마음의 전봇대"라고 일갈했다.

▦ 반면 비판세력은 전봇대를 MB식 생색내기 전시행정의 표본으로 꼽는다. 대불공단에 예정에 없던 중소 조선업체가 입주함으로써 발생한 문제는 전선을 땅밑으로 가설하거나 도로 폭을 10차선으로 넓혀야 해결되고 이를 위해선 수천억 원의 예산이 소요된다. 그러나 관련 부처나 지자체는 현장의 숙원을 외면한 채 임기응변으로 애꿎은 전봇대에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공단 입주업체들이 '전봇대 옮기기' 해프닝을 씁쓸함 대신 '코믹한 뉴스'로 받아들인 이유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새해 예산에서 이 대목을 관심있게 살펴봤는지 더욱 궁금하다.

▦ MB정부 들어 정치경제적 논란의 볼모가 돼 고생하던 전봇대가 최근 불황을 알리는 이정표가 됐다. 780만개에 달하는 전국 곳곳의 전봇대는 지금 '눈물의 부도정치 창고 대방출' '싼 이자 일수 쓰실 분' '급매매 급전세' 등 불황의 상처인 각종 전단지 스티커 등으로 도배질되고 있다. 장년층 이상의 서민들에게 숱한 추억의 소재로 남아 있던 전봇대가 이번엔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보듬고 있는 셈이다. 전봇대 밑에 연탄재가 수북히 쌓여 있던 70년대 풍경을 떠올리면 전봇대가 한 마디 할 법도 하다. "전봇대 함부로 씹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밝은 빛이었느냐."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