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서 과연 중립이 가능합니까. 어느 한 쪽에 서야지요. 어정쩡하게 지내가다 총선 때 낙동강 오리알 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한나라당 친박 성향 의원이 3일 '특정 계보로 비치는 게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즉각 내놓은 답변이었다. 당내에 "나라도, 당도 어려운데 계파는 무슨 계파냐"는 충정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목소리는 계파 대립이라는 엄연한 현실 속에 묻히고 있다. 소속 의원 172명 가운데 친이계 또는 친박계로 분류되는 의원이 150명에 육박한다.
민주당도 서서히 분화하고 있다. 2일에는 '야당 속의 야당'을 내건 개혁성향 모임인 '민주연대'가 출범했다. 그 전날 당내 60세 이상 원로ㆍ중진 15명으로 구성된 '민주 시니어' 그룹이 정세균 대표를 초청,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진짜 반대할 것은 원칙을 정해서 하라"고 훈수했다. 관료 등 전문직 출신 의원들은 중도보수, 온건합리를 내세우면서 세력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세력분화 현상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를 두고 '신(新)계파 정치'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계파는 계파이되 3김시대의 계파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3김시대에는 돈과 공천, 지역 등을 매개로 한 1인 보스 중심의 계파정치가 성행했으나 지금은 전혀 다른 성격의 계파정치가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매개체가 달라진 것이다. 한나라당의 친이계, 친박계는 과거의 대선후보 경선과 미래의 경선을 염두에 둔 이합집산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지역(수도권/영남권)과 이념 차이도 가미돼 있지만 그런 측면은 미미하다.
민주당의 세력 분화는 노선(진보개혁/중도보수)과 출신ㆍ직업(민주화운동세력/관료 등 전문가 출신) 정당뿌리(열린우리당/구 민주당) 등에 따른 것이다.
이런 신계보 정치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돈과 공천을 고리로 한 계보가 아니라는 점, 당내 권력독점을 방지해 정당의 민주성을 제고시킨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여당의 계파 갈등은 집권세력의 의사결정 및 집행기능을 약화시키는 문제점을 낳고 있고 야당의 계파 정치도 노선 논쟁을 빙자한 분열상을 노정할 우려가 있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대선이 4년 남은 시점인데도 잠재적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한 계보 정치가 힘을 발휘하면 역기능을 초래한다"면서 "한나라당은 보수정당의 정체성을 놓고 논쟁하는 구도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민주당에 대해 "리더십이 실종된 민주당에서 노선 논쟁의 싹이 트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하지만 세력다툼이 아니라 대안과 비전을 둘러싼 건전한 논쟁이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광덕 기자
■ '현재-미래권력' 불신·반목힘 못쓰는 '모래성 巨與'
한나라당의 양대 계파인 친이명박계, 친박근혜계는 지난해 대선 경선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로부터 1년4개월여가 지났는데도 이 구도는 여전하다. 아니 더욱 강해졌다고 봐야 한다. 172석 거대 여당이 제대로 일을 못한다고 비난받는 근본 이유가 바로 이 친이, 친박 갈등때문이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정도다.
'현재 권력'과 가능성 큰 '미래 권력'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양대 계파는 아직도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있다. 불신의 골이 메워지지 않으니 화학적 결합이 될 턱이 없다.
서로 신뢰가 없기 때문에 국정 운영과 주요 현안에 대해 사사건건 이견을 노출 할 수밖에 없다. 수도권 규제 완화나 인사 정책, 대북 정책 등을 두고 갈등을 드러낸 게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이른바 '박근혜 역할론'을 두고 또 감정 싸움을 벌였다. 친이 진영에서 "지금은 통합해야 할 때"라며 박근혜 전 대표가 현정권의 성공을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친박 진영은 발끈했다.
친박계는 '박근혜 역할론'에 대해 "홀대 해 놓고 어려워지니까 박 전 대표를 찾는다" "정국이 안 풀리니 친박이 돕지 않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만들려는 게 아니냐"는 등으로 의심의 시선을 보낸다. 이 정도니 서로의 진정성은 통하기가 어렵다.
홍준표 원내대표가 1일 "아직도 양쪽 진영에서 경선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부끄럽다. 소위 친이 진영은 옹졸히 대처해서는 안 되고, 친박 진영도 응석을 부리고 앙탈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 것은 여당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또 친박계의 물밑 세 확산 현상을 시사하는 주이야박(晝李夜朴ㆍ낮은 친이계 밤은 친박계) 월박(越朴ㆍ친박계로 넘어감) 복박(復朴ㆍ친박계로 복귀) 본박(本朴ㆍ본래 친박계) 원박(源朴ㆍ원래 친박계) 등의 신조어가 유행하는 것도 '모래알 여당'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방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걱정하며 융합해야 磯募?목소리도 많다. "승자가 먼저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김문수 경기지사) "박 전 대표가 정권이 어려울 때 도와 주는게 맞다"(홍 원내대표)는 등 서로 한발씩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간격을 줄이려는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기류도 있다. 물론 양대 계파의 신뢰 정도를 감안하면 이 같은 목소리가 현실화 하기가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국정 운영 동력 확보를 위해서라도 계파 갈등 극복은 지금 여권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 중도 진보-보수 정체성 분화"정당정치 본령" "알력 소지"
민주당 내부에서 꿈틀대는 그룹핑은 정파 모임의 성격이 짙다. 기본적으로 이념과 노선, 정체성에 따른 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1인 보스를 중심으로 한 계파정치보다는 정당정치의 본령에 가까워졌다는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하지만 상시 갈등을 유발해 소수야당의 한계를 극대화하는 부작용도 배제할 수 없다.
정파의 특성이 가장 강한 모임은 '민주연대'와 '민주시니어모임'이다. 민주연대는 원내ㆍ외 중도진보 세력을 포괄한 반면, 민주시니어모임은 60세 이상의 모임이면서도 당내 중도보수 진영의 대표격이다.
양측은 최근 정세균 대표 체제의 향후 진로를 놓고 각각 견제야당, 정책야당을 소리 높여 주장하면서 일합을 겨뤘다. 민주연대의 좌장인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민주시니어모임의 강봉균 의원은 과거 열린우리당 때도 '개혁_실용' 논쟁의 정점에 서 있었다.
이종걸 문학진 이춘석 장세환 의원 등 소장개혁파가 주축이 된 '국민모임'은 민주연대의 전위부대격이고, 신계륜 전 의원이 주도하고 있는 '신정치문화원'은 재기를 모색하고 있는 386 정치인들의 사랑방을 자임했다. 안희정 최고위원을 중심으로 한 친노386의 일부도 민주연대에 참여했다.
반면 보수 성향이 강한 관료ㆍ학자그룹의 홍재형 우제창 변재일 의원 등은 노선과 정체성 측면에서 민주시니어모임과 궤를 같이 한다. 지금껏 당 안팎의 수많은 현안들에 대해 침묵해 온 상당수 의원들도 기본적으로는 중도보수 성향이란 게 대체적 평가다.
정세균 대표와 원혜영 원내대표를 주축으로 한 이른바 신주류의 위치는 민주연대와 민주시니어모임의 중간이다. 정 대표가 지금껏 정책야당과 견제야당을 동시에 추구해 온 이유를 당내 지형도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희상 국회부의장과 김효석 민주정책연구원장 등 중도파 중진그룹은 정 대표 체제의 든든한 후견자다.
하지만 신주류는 그야말로 당권을 매개로 한 일시적 그룹핑에 가깝다. 최근 당 안팎의 비판에 직면한 정 대표가 견제야당 쪽으로 기우는 듯하자 정 대표 측근그룹과 중진그룹 모두에서 이견이 표면화하기 시작한 것도,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민주연대와 민주시니어모임이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중도진보 진영과 중도보수 진영의 경쟁이 감정 싸움으로 흐를 개연성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한 중진의원은 "당내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 자체를 백안시할 필요는 전혀 없다"며 "양측이 당의 진로와 정책, 대여 관계 등을 놓고 생산적으로 경쟁하고 당론이 결정되면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국민의 평가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정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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