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도 정신을 빼 놓고 지내서, 가을이 갔는지 겨울이 왔는지 미처 모르고 산다. 그저 뉴스를 보다가 '가을 막바지 산행'이나 '초겨울 주말 풍경' 같은 표현들을 접하고서야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시내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생각보다 쌀쌀해진 날씨에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한다. 지하도 입구로 내려가려는데 할머님 한 분이 노란 귤을 파신다.
하염없이 쌓인 귤이 너무 많아 보여, 나라도 몇 개 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손에 넣은 귤 한 봉지. 지하철 기다리는 동안 한 개 껍질을 깐다. 아, 겨울 냄새! 귤껍질 까는 내 손톱이 노랗게 물든다.
■ 귤
귤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과일이다. 아무렇게나 생긴 것 같으면서도 배시시한 색깔이며, 껍질의 감촉이며, 그 향기와 과즙의 생생함이 참으로 묘하다.
다른 과일은 칼을 쥔 사람(주로 엄마나 큰언니)이 대표로 깎아서 접시에 빙 돌려 담아 상에 나오지만, 귤은 다르다. 귤 그 자체로 소쿠리나 쟁반에 담겨 나온다. 모두 귤 하나씩 턱 잡고 까기 시작한다.
각자 먹을 귤은 각자 깐다. 그러니까 방안은 일순간 귤 냄새로 가득 차게 된다. 귤껍질을 까면서 이미 입에는 침이 고인다. 다른 사람이 껍질을 까 준 귤은 그래서 맛이 덜하다.
<본초강목> 이나 <본초비요> 같은 한의서에서도 귤은 넘치게 칭찬 받는다. 특히 요즘처럼 감기 걸리기 쉬울 때 귤 먹으면 좋은 것은 누구나 알지만, 가슴에 울화 찼을 때 막힌 기(氣)를 뚫어주는 작용을 귤이 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 본초비요> 본초강목>
귤은 이밖에도 비만 방지에 좋고 이뇨와 소화를 돕는다는데, 특이한 것은 이 모든 영양이 귤의 속살보다 껍질에 더 많다는 사실이다.
■ 무농약 귤
귤껍질이 몸에 약이 되는 것을 알지만, 선뜻 먹거리로 이용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농약 성분 때문이다. 귤을 소금물에 담그고, 식초나 친환경 세제로 씻는 등의 노력은 일일이 참 번거롭다. 그래서 무농약 귤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가던 중, 서귀포시에서 귤밭을 일구시는 아주머님을 중문 5일장에서 우연히 뵙게 되었다.
'무농약 귤'이라 손글씨로 쓰인 작은 푯말에 발이 딱 멈췄는데, 실례를 무릅쓰고 정말 농약을 안 쓰셨느냐고 여쭈니, 한두 개 먹어보라 권하셨다. 귤 속살도 살이지만, 평소에도 귤 먹을 때 껍질을 물어뜯어보는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관심사가 껍질로 몰렸다. 일단,
일반 귤은 껍질이 쓰다. 쓰다 못해 혀가 아릴 때도 있다. 잔류하는 농약 성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농약을 안 쓴 귤은 껍질을 물어도 쓰지 않다. 녹차를 마실 때의 기분 좋은 쌉쌀함이라면 모를까, 혀가 따끔거리는 아린 맛이 나지 않는다. 야들야들하고, 쓰지 않다.
무농약이면 손이 더 많이 가지 않는지 여쭈자, 손은 가지만 밭이 농약 쉴 때가 돼서 2년째 약을 안 주고 있다고 하셨다. "속에꺼 먹고, 껍질은 모았다 끓여서 엄마 드려" 하시길래 "네" 하고 대답은 잘했다.
요즘 농업선진국에서는 유기농과는 또 차별되는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이 화두란다. 달의 회전주기, 별자리의 움직임 등을 파악하여 그에 맞게 땅을 가꾼다는데, 그런 땅에서 거둔 포도로 만든 와인 등이 실제로 판매되고 있다.
자연의 순환에 가장 순응하는 땅에서 자란 산물이 가장 몸에 좋다는 당연한 이치인데, 우리 인간들 먹여 살리느라 지친 땅은 종종 자연의 순환고리에서 길을 잃는다. 억지로 먹는 농약, 공해가 잔뜩 섞인 빗물 등이 너무 오랜 세월 땅에 스며왔기 때문이다.
■ 귤 먹는 법
귤이 너무 맛있어서 오래 두고 먹으려 잼을 만들고, 술을 담그지만 사실 귤은 그냥 까서 바로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 서양에서는 신 맛 나는 과일을 졸여서 육류를 먹을 때 곁들이곤 하는데 그 방법도 이용해 볼 만하다. 귤 조림을 닭 가슴살이나 훈제 오리 고기에 곁들이면 지방질 없어 빡빡한 고기 맛을 보완하고 소화도 잘 된다.
귤의 새콤달콤한 맛이 간장이랑 잘 어울려서 깐풍기나 닭 강정을 만들 때 귤껍질을 넣어 한데 볶으면 향이 좋다. 간장, 귤 즙, 식초, 참기름 약간으로 샐러드드레싱을 만들어도 괜찮다.
시금치, 호두, 속살만 취한 귤에다가 뿌려 먹는다. 카스텔라를 반 가르고 귤 시럽을 촉촉이 바른 다음, 귤 조림을 살짝 바르고 그 위에 휘핑크림을 덧발라 나머지 반토막의 카스텔라를 얹으면 이 겨울, 차 한 잔과 잘 어울리는 귤 맛 케이크가 만들어진다.
귤은 겨울 맛이다. 한겨울이면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오신 귤 한 봉지가 무엇보다 반갑고,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한 애인의 두툼한 파커 주머니에서 나를 기다리는 귤 두 개가 꿀보다 달다.
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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