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용건설은 지난달 초 싱가포르에서 국내 건설사가 해외에서 수주한 토목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인 6억3,300만달러(약 9,300억원)짜리 지하도로 건설 사업을 수주했다. 총 연장이 1㎞에 불과한 짧은 도로를 놓는 프로젝트지만, 1m 당 공사비가 우리 돈으로 9억3,000만원이나 된다. 국내 도로공사 중 최고가로 꼽히는 성남 판교지구 8차선 지하도로의 1m 당 7,200만원과 비교해도 무려 13배 가량 비싼 고부가가치 공사다.
#. 현대건설은 올해 5월 중동 카타르에서 단일 플랜트 사상 최대 규모인 20억7,000만달러의 발전담수시설 공사를 수주, 국내ㆍ외 경쟁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단순히 액수가 크다는 사실을 넘어 해외에서 첨단 기술력을 공인 받았다는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이 공사를 통해서 국내 건설업체 중 가장 먼저 '해외 수주 600억달러 달성'이라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다.
건설업계는 올해 국내에서 지방 미분양과 유동성 위기설 등으로 '최악'의 시련을 겪었지만, 적어도 해외 수주에선 '최고'와 '최대'의 수식어가 끊이지 않은 화려한 한해를 보냈다.
국토해양부와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 말 현재 국내 업체들의 해외건설 수주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354억7,126만달러)에 비해 28% 급증한 455억4,779만달러(537건)에 달했다.
국내 건설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설업계 실상을 감안할 때, 끊이지 않고 이어진 해외 수주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만난 '오아시스'나 다름 없었다.
올해 해외시장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린 곳은 현대건설이다. 11월 15일 현재 국내 건설업체 중 가장 많은 6조2,175억원을 수주했다. GS건설도 올해 해외에서 4조6,940억원 어치를 수주, 2위를 기록했다.
시공능력 1위인 대우건설(2조398억원)과 포스코건설(1조3,033억원), 롯데건설(1조1,277억원)도 올해 1조원 이상의 높은 수주 실적을 올렸다.
■ 기술력으로 승부한다
이처럼 수주 물량도 크게 늘었지만, 올해 해외 수주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사업비 1억달러 이상의 대형 공사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고가 수주 사업은 높은 기술력과 현장 관리 능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것이다.
쌍용건설이 1m 당 9억원이 넘는 고가의 공사를 수주한 것과 현대건설이 국내 업계 최초로 일본 및 유럽 일부 건설사가 독점해온 고부가가치 플랜트 공사인 천연가스액화정제시설(GTL)에 진출한 것 등은 전적으로 기술 경쟁력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GS건설 관계자는 "그 동안 국내 건설사가 해외 공사를 수주하는 방식도 많이 바뀌어 최근엔 오랜 기간 축적된 기술 노하우와 인지도를 바탕으로 고가의 고수익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일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스트 오일달러' 시대를 대비하라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 실적이 중동 등 일부지역에 밀집돼 있고, 공사의 종류도 플랜트에 집중돼 있다는 점은 앞으로 개선돼야 할 부분으로 꼽힌다.
이미 국내 상위권 건설사들을 중심으로 칠레, 엘살바도르, 가나, 나이지리아 등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으로 해외 진출국 확대에 나섰다. 또한 석유화학 플랜트 중심에서 도심 인프라, 초고층 고급 건축시장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철저한 리스크 관리 없이 불어난 오일달러만 믿고 섣불리 해외 시장에 진출할 경우 사업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국제 유가가 크게 떨어진 만큼, 해외 시장에 진출할 때는 '포스트 오일달러'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배럴 당 100달러가 넘던 유가가 최근 50달러대로 떨어지면서 중동 지역 국가들의 발주 물량에도 곧 변화가 생길 것"이라며 "해외에서 꾸준한 캐시카우를 유지하려면 수주 지역 및 공사의 종류를 다변화하는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정부에 바란다/ "중소 업체 해외진출 보증발급 개선을"
국내 건설업계는 정부의 해외시장 개척 지원이 확대되기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국내 건설경기 침체 탓에 해외 진출 시도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 중견 건설업체 관계자는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면 대다수 업체가 해외사업 경험은 전무한 실정"이라며 "국토해양부가 추진 중인 해외 건설시장 개척 지원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관련 예산도 크게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방법도 소개됐다. 경제협력자금 지원 대상국을 아프리카와 중남미, 중앙아시아 등 앞으로 우리 건설업체들이 진출할 지역에 집중하는 전략이다.
D건설 관계자는 "후진국에 대한 지원은 단기적으로 '지출'성격이 강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선 '투자'"라며 "특히 중동지역 플랜트 사업엔 한계가 있는 만큼, 새로운 시장이 될 지역을 집중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사업 경험이 부족한 중소ㆍ중견 후발업체에 대한 보증 발급도 시급히 개선돼야 할 문제로 지적됐다. 한 중소 건설업체 관계자는 "중소ㆍ중견업체의 경우 시공능력은 있지만 해외건설 보증 발급 때 금융기관에서 담보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외화벌이 효과가 크다면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근거로 보증을 서 주는 방안도 검토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해외 근로자의 비중이 단순 기능직 위주에서 최근 고급 기술자 및 전문 관리자 위주로 바뀜에 따라 해외 근로자에 대한 비과세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H건설 관계자는 "과거 해외 근무 인센티브가 국내 임금의 2~2.5배이던 것이 현재는 1.5배 수준"이라며 "정부가 이들의 비과세 한도를 늘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 김승준 쌍용건설 해외사업본부장 "UAE 아부다비 시장 주목"
"고부가가치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기술 경쟁력을 서둘러 확보하는 것이 해외에서 '블루오션' 시장을 선점하는 지름길이다."
김승준 쌍용건설 해외사업본부장은 국내 건설업계의 위기 탈출구가 해외 시장, 특히 단순 시공사업이 아닌 초고층 건축물과 고난이도 기술력이 요구되는 고부가가치 인프라 사업 수주에 있다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고유가가 한풀 꺾인 데다, 세계 금융위기와 실물경기 침체 여파가 겹치면서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내년 상반기까지는 발주가 주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고급 건축물 시장의 경우 발주는 늘어나는데 비해 사업 수행 능력을 갖춘 업체는 상대적으로 적어, 기술 경쟁력을 갖춘 상위 업체에겐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해외 발주 성향을 보면 공사 수행 여건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결국 설계와 공법에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본부장은 새로운 시장 개척에도 힘을 기울일 것을 주문했다. 최근 주목하는 곳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아부다비. 그는 "두바이는 건설ㆍ부동산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만큼, 앞으로 우리 업체들이 관심을 갖고 노려볼 만한 곳은 아부다비"라며 "특히 신도시 건설 계획에 따라 추진되는 인프라 구축 사업과 초고층 고급 건축물 수주를 염두에 두고 시장 진출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이어 "중국계 건설사들은 이미 제3국에 진출해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며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을 비롯해 천연자원이 풍부한 제3국가 시장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태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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