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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8> 비탈-사랑의 포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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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38> 비탈-사랑의 포물선

입력
2008.12.0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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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두 해 사이에 뱃살이 부쩍 늘었다. 맛난 음식과 술을 탐하고, 운동(사회정치운동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여기선 신체운동 말이다)에는 전혀 뜻이 없으니, 억울하달 수도 없다. 또래 친구들이랑 말을 섞어보니, 다 제 나름대로 운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수수하게 헬스클럽엘 다니는 이들도 있고, 약간 '귀족적으로' 테니스나 골프에 몰입하는 이들도 있고, 약간 '고전적'으로 요가나 기공(氣功)에 취미를 들인 이들도 있다. 어떤 친구들은 주말마다 산을 찾는다. 거의 재소자에 비길 만한 실내생활자인 내가 하는 운동이라곤 술잔이나 담배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뿐이다.

한 여자친구가 제 주말 등산모임에 끼라고 호의를 보였으나, 사양했다. 꼭 산다운 산만이 아니라, 서울의 남산이나 대모산처럼 '산 같지도 않은 산'을 오르는 일도 내겐 버겁다. 그 말을 했더니 그 친구가 등산이 정 싫으면 평지라도 걸으란다. 뱃살 빼는 덴 걷는 게 제일이라는 것이다.

꼭 그 친구의 충고 때문만은 아니지만, 요즘은 게으르게나마 일주일에 한두 번은 걸어보려고 애쓴다. 강남의 집에 머물 땐 양재천변을 걷고, 강북의 일터(라기보다는 놀이터지만)에 머물 땐 청계천변을 걷는다. 이따금 불광천변으로 진출해보기도 한다. 옆에 물이라도 있어야, 걷기의 밋밋함이 줄어든다. 특히 서울처럼 볼품없는 도시에서는.

이 행성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어디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서울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미가 제 자식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무조건적 사랑이다. 서울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는 나에겐 가장 편안한 도시가 서울이다. 그리고 편안함은 사랑과 통한다.

그러나 나는 제 새끼가 함함하다고 주장하는 고슴도치는 아니다. 나는 서울을 사랑하지만, 이 도시의 멋없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내가 돌아다녀본 외국의 수도(首都)들 가운데, 서울만큼 매력 없는 도시는 없었다. 그 몰(沒)역사와 무질서와 산문성(散文性)이라니 참...... 그러니까 내 서울 사랑은 어느 정도는 의무적 사랑이다. 아니 '가족주의적' 사랑이다.

서울은 편한 도시다. 이곳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도 그걸 어느 정도 인정할 게다. 24시간 문을 여는 상점이 수두룩하고, 한강둔치에까지 밥과 술을 배달해주는 서비스가 있는 곳이 서울이다. 무료 공중화장실이 서울만큼 흔한 도시도 찾기 어려울 테다.

그런데 이 편한 서울이 내게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야 할 때다. 서울엔 비탈길이 너무 많다. 그 비탈길을 달리는 탈것들도 자주 비틀거린다. 한길만이 아니라 골목길도 비탈진 곳이 많다. 그런데 나는, 비탈길을 내려가는 건 몰라도 오르는 건 질색이다.

내가 가본 도시 가운데 서울처럼 비탈길이 많은 도시는 리스본과 샌프란시스코밖에 없다. 잠깐 머물렀을 뿐이어서 두 도시의 지형을 넉넉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비탈짐에서 리스본은 서울을 앞서고, 샌프란시스코는 서울에 조금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리스본에서고 샌프란시스코에서고, 열심히 걸었다. 두 곳 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도시였으므로. 서울에서라면 그런 오르막 비탈길은 절대 걷지 않았으리라.

아름답기로는 리스본이 샌프란시스코만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정(情)은 리스본 쪽에 더 갔다. 태평양 연안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가난의 낌새를 대서양 연안 도시에서 살짝 알아챈 탓인지도 모르겠다. 테주강(江)변에서 시내 쪽으로 난 비탈길들을 오르며, 나는 서울에서 살던 동네들의 비탈길을 생각했다.

서울에서 이따금 산책을 할 때, 되도록 평지만 골라 걷는다. 내리막길도 피한다. 그 내리막이 끝나면 오르막이 시작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지라면 경보 선수 못지않게 씩씩한 걸음으로 걸을 수 있지만, 오르막길을 걷는 건 지옥이다. 다리보다 허파가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하긴 담배에 손을 댄 게 34년째니, 이것 역시 억울하달 수 없다.

열정의 오르막과 내리막에 출렁

사랑의 행로도 비탈길 비슷한 것 아닐까?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 늘 평정을 이룰 수만은 없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숨쉬기와 희로애락에서도, 사랑과 걷기는 사뭇 닮았다. 열정이 높은 기울기로 상승할 때, 거기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엔 조바심과 불안이 들러붙어 있다. 비탈길을 오를 때처럼 숨도 가빠진다.

높은 기울기로 상승하는 열정은, 높은 기울기로 하강하는 열정만큼이나 스트레스다. 열정이 하강할 때도, 슬픔과 허무감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엔 후련함, 속 시원함, 해방감이 따른다. 비탈길을 내려갈 때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을 잘 아는 연인들은, 정열의 기울기와 속도를 조절해가며 사랑?이어나갈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연인들은, 열정의 기울기와 속도에 휘둘려, 사랑을 망쳐버릴 것이다.

그런데, 길게 이어지는 사랑이 망쳐버린 사랑보다 꼭 낫다는 법은 없다. 가장 볼품있는 사랑은 때로 가장 망쳐버린 사랑이다. 줄리엣과 로미오의 사랑처럼. 그것은 선택의 문제다. 아니, 운명의 문제다.

가파르게 올랐다가 정점에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열정도 있을 테고, 낮은 기울기로 천천히 오르며 끝없이 이어지는 열정도 있을 테다. 또 한 대상을 두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되풀이하는 열정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열정 가운데 기울기가 변덕스러운 열정도 있을 테다. 그러니까 사랑의 비탈은 직선이 아니라, 포물선을 포함한 곡선일 수 있다. 구간마다 미분 값이 달라질 수 있다. 아니, 달라지는 게 예사일 것이다. 사랑은 어지러운 행적을 그리는, 굽이굽이 비탈이다.

조금 상투적이기는 하나, 비탈은 섹스행위에 대한 은유 노릇도 할 수 있다. 기울기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오르막길의 끝머리가 바로 오르가즘이다.

오르막과 오르가즘? 아무 관련 없는 낱말들이 때때로 이런 형태적 공통인수를 지니기도 한다. 그러나 익살 가운데 가장 어설프고 썰렁한 것이 이런 식의 말놀이다. 아무튼 섹스의 비탈은 내리막의 기울기가 오르막의 기울기보다 훨씬 더 큰 것 같다.

사랑은 비스듬… 그래서 어려운…

비탈진 정도 즉 기울기를 '물매'라고도 한다. 예컨대 "한국 애니메이션 수준과 일본 애니메이션 수준은 그 물매가 가파르다"라는 문장은 두 나라 애니메이션의 수준 차가 크다는 뜻이다. 여기서 '가파르다'를 '싸다'라는 형용사로 바꿀 수 있다. 즉 '싸다'는 '가파르다'의 유의어다. 그리고 이 '가파르다', '싸다'의 반의어는 '뜨다'다.

우리 글판에서 '물매가 싸다'라는 표현을 애용하는 이로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복거일씨가 있다. 세련미가 돋보이고, 여러 번 듣다 보니 그 생경함이 이젠 거의 사라져버리긴 했으나, 나 같으면 이 경우에 '기울기가 가파르다'라고 쓰겠다.

'기울기가 가파르다'라는 표현을 '물매가 싸다'라고 표현한다 해서, 지식의 확장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외려 소통의 벽을 쌓을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보급하려고) 열심히 쓰는 복거일씨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물매가 싸다' '물매가 뜨다' 같은 표현은 한 번 써봄직도 하다. 무엇보다도, 말 자체가 예쁘니까. 아름다운 한국어니까.

'비탈'은 '빗[斜, 橫]'과 '달[地]'로 분석된다. 어근 '빗'은 '빗나가다' '빗디디다' '빗맞다' '빗금' '빗더서다(바로 서지 않고 방향을 좀 틀어서 서다)' '빗듣다(말을 잘못 듣다)' '빗뜨다(눈망울을 바로 뜨지 않고 옆으로 흘겨 뜨다)', '빗보다(사실대로 보지 않고 잘못 보다)', '비끼다(비스듬히 놓이거나 비치다 < 빗기다)', '비뚤다[歪]', '비스듬히' 따위의 낱말들에서 보듯, '바로 곧지 아니하게' '가로 비스듬히'라는 뜻을 지녔다. 우리가 '엇갈리다'를 다루면서 살핀 '엇'과 통한다 할 수 있다.

'달'은 양달[陽地], 응달[陰地]에서 보듯 땅[地 , 處]을 뜻한다. 평양의 옛 이름(이 아니라면 그 곳을 중심으로 한 고대 부족국가의 이름)으로 알려진 '아사달'의 '달' 역시 땅을 가리켰으리라. 그래서 '아사달'을 '아침땅'으로 해석하는 '낭만적' 실증주의 사학자들도 있었다.

'아사달'의 '아사'를 일본어 아사(아침)와 연결시킨 것이다. 그게 그리 실증주의적 태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고구려어(고대 한국어)에서 '달'이 '(높은 지대의) 땅'을 의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비탈은 어원적으로 '비스듬한 땅'이다. 사랑은 그 비스듬한 땅을, 비탈을 기어오르고, 굴러 떨어진다. 사랑은 비스듬하다. 그것이 모든 사랑의 어려움일 것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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