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이른 아침 사백 쉰 살 노송(老松)의 극락길을 배웅하러 오대산 동쪽 기슭, 삼산리로 가는 길은 스산했다. 해발 960m의 진고개를 넘을 땐 눈보라가 몰아쳐 제설차 꽁무니를 바싹 쫓아야 했고, 소금강 진입로를 달릴 땐 활엽수 낙엽이 비바람에 흩날렸다. 소나무의 죽음이 호상(好喪)이 아님을 아는 눈치였다.
이날 오전 10시 강원 강릉 연곡면 삼산리에서 최근 고사(枯死) 판정을 받은 천연기념물 제350호 삼산리소나무에 대한 천도재(薦度齋)가 열렸다.
삼산리 주민들이 시민단체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월정사 스님들과 함께 준비했다.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는 불교 의식인 천도재가 나무를 위해 치러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명승 제1호인 소금강 초입에 있는 삼산리소나무는 소금강 풍치를 즐겼던 율곡 이이(1536~1584)가 손수 심었다는 전설을 지닌 유서 깊은 금강송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98년. 그러나 높이 22m, 밑동 둘레 4.6m의 당당한 풍채는 2000년부터 말라가기 시작했다.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던 붉은 몸통은 푸석한 암갈색으로 변했다. 2.7m 높이에서 양 갈래로 뻗은 줄기는 강철심과 밧줄로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문화재청은 지난 9월 삼산리소나무의 천연기념물 지정 해제를 예고했다. 안내 입간판과 보호용 울타리도 곧 철거될 것이다.
추적대는 빗속에서 나무를 한참 바라보던 주민 정춘교(64)씨는 담배를 꺼내물었다. "아까운 나무가 죽었어, 얼마나 보기 좋았는데." 단지 마을의 볼거리, 자랑거리가 사라졌다는 탄식은 아니다. "이게 서낭나무거든. 선대부터 해마다 이 앞에서 제사 지내며 무탈을 빌어왔지. 덕분인지 6ㆍ25 때도 여긴 조용했어. 큰 산불 한 번 없었고." 오랫동안 삼산리를 든든히 지켜주던 신목(神木)이 운명했으니 주민들의 상실감은 결코 작을 수 없다.
소나무 옆엔 주민들이 내건, 문화재청을 성토하는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관리 당국의 실책으로 나무가 죽었다는 것이다.
조병화(53)씨는 "4년 전쯤 공무원들이 나무를 손본다며 굵은 가지를 막 쳐내고, 주변의 오래된 참나무 네 그루도 벴다"며 "어르신들이 저러면 오래 못산다고 걱정했는데, 결국 올해부터 새 잎이 돋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재복(50)씨는 "환경만 맞으면 천 년도 사는 게 나무인데, 당국에선 사과 없이 수명이 다했다고만 한다"고 속상해 했다.
학생들과 삼산리를 찾은 윤여창 서울대 교수(산림과학부)도 문화재청의 조치를 문제 삼았다. 윤 교수는 "나무가 서 있는 땅이 주변보다 높은데 이렇게 일부러 흙을 덮을 경우 나무 줄기가 아래부터 썩게 된다"고 지적했다.
애초 작은 당숲(마을을 지켜주는 숲)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을 전부 없애고 소나무만 덩그러니 남긴 것도 실수라고 했다. 윤 교수는 "숲 차원에서 나무 건강 문제를 보지 못해 결국 나무와 숲 둘 다 훼손됐다"고 말했다.
재단이 차려지자 비가 그쳤다. 답답한 천막이 걷히고, 주민과 외지인 40여 명이 나무 주변에 둘러섰다. 이장 김석섭(50)씨가 추도사를 읽었다. "태풍 루사와 매미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소나무를 보고 힘을 얻곤 했습니다. 헌데 우리들의 정신처럼 여겨왔던 소나무를 지나온 꿈처럼 보내드려야 합니다."
시민의모임 윤주옥 사무처장은 나무의 못다한 말을 대신 전했다. "나는 독야청청(獨也靑靑) 소나무보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 소나무이길 원했나 봅니다." 어느덧 구름은 걷혔고 따스한 햇볕이 고목의 젖은 몸을 말렸다.
이윽고 천도재가 시작됐다. 재를 올릴 줄 아는 스님이 많지 않아 두 스님이 먼 길을 왔다. 남승은 천수다라니를 독경하고 여승은 바라춤을 췄다. 나이 지긋한 주민 여럿이 무릎을 꿇고 합장했다. 그 중 박인실(79) 할머니는 소나무 바로 옆 마을에서 민박을 치며 1년에 두 번씩 서낭신 제사를 챙겨온 사람이다.
마지막 제사는 지난달 2일, 음력 10월 초닷새에 있었다. 박씨는 "예전엔 제사 때 아니면 감히 범접 못할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나무 옆엔 서낭당도 있었는데, 유신 시절 공무원들이 '어명'이라며 들이닥쳐 불태웠다고 한다. "서낭나무 덕인지 나쁜 일, 손해보는 일 없이 잘 살아왔다"는 박씨는 나무의 명복을 빌며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렸다.
재를 마친 주민들은 한결 밝아보였다. 손님들에게 고깃국, 메밀전, 순대 등 푸짐한 점심을 내왔다. 70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에 왁자한 한낮 축제가 벌어졌다. 월정사 성묵 스님은 "나무의 극락왕생을 비는 자리에 당국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걸 만큼 울분이 컸던 주민들도 조금씩 마음을 추스리고 있다"고 전했다.
넋이 빠져나갔지만 나무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을 모양이다. 마을 어르신 김형락(81)씨는 "농번기엔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겨울엔 아름다운 눈꽃을 피웠던 나무"라며 "안 그래도 허전하고 섭섭한데 나무를 베면 추억마저 사라지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주민들은 내년 봄부터 소나무 주변에 나무를 심어 마을 숲을 복원할 계획이다.
강릉=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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