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근사한 비주얼은 여전했다. 매끈한 피부와 날렵한 몸매에서 시간의 침투 흔적을 찾긴 힘들었다. 자신의 첫 영화 주연작 '젊은 남자' 제목처럼 그는 여전히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TV드라마 '모래시계'로 대중들의 머리 속에 들어앉은 지 벌써 13년, 물리적 나이도 만 35세다. 영화든 생활이든 삶의 전환기를 모색할 때다.
그래서일까. 2005년 '태풍' 이후 '1724 기방 난동사건'(12월 4일 개봉)으로 3년 만에 스크린을 찾은 이정재의 모습은 파격적이다. '1724 기방 난동사건'은 '세상 속으로'와 '죽이는 이야기' 등으로 세상을 향해 날선 유머를 들이밀었던 여균동 감독의 신작. 조선 경종 말기인 1724년 한양의 뒷골목을 B급 정서로 조명한다.
이정재가 맡은 역할은 마포 한량 천둥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국구 주먹 짝귀(여균동)를 한방에 보내고, 야봉파 두목 만득(김석훈)과 함께 얄궂은 대척점에 서는 역할이다. 영화는 이정재의 휘날리는 쌍코피를 느린 화면으로 잡아내거나 한껏 구겨진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외형만 보면 웃음을 위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역할. 많은 사람들이 "이정재의 변신"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변신이 아니다"고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코믹한 표현이 다양하진 않은 듯해요. 연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양은 없다'와 비슷한 면도 있어요." 자신의 특유의 뺀질한 이미지가 좀 더 과장되게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가장 힘들게 찍은 장면은 허무하게 잘려나갔다. 만득 일당에게 붙잡혀 거꾸로 매달린 채 무차별 린치를 당하는 장면은 겨울 밤을 꼬박 새며 찍었지만, 정작 영화에선 몇 초 분량으로 처리된다. "가장 추운 날 찍었는데 온몸에 물을 뿌리고 피칠을 했죠.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 가짜 피가 코로 막 들어와서 대사 처리조차 힘들었어요."
여균동 감독과의 촬영 장면은 의외로 술술 넘어가 오히려 아쉬웠다고 했다. "제가 봤을 때 다시 찍었으면 좋겠는데, 막 오케이하면서 넘어가더라고요. 자기 나오는 장면에서 시간 지체하고 제작비 많이 쓰면 남들이 뭐라 할까 봐 그랬나."(웃음)
이정재는 나이가 드니 "캐릭터가 조금 잡히는 듯하다"고도 했다. "예전에도 여러 연기 설정을 해보고 없는 대사도 만들어 봤지만 이제야 다른 면이 보인다"며 "평면적이지 않은, 입체적인 캐릭터를 더 만들 수 있을 듯하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나이도 나이라 연애와 결혼 이야기도 피해 가지 않았다. 그는 "배우가 자유 직업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결혼에 대해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여자는 항상 만나고 싶죠. 남자들이라면 다 그렇지 않나요. 일 때문에 연애와 결혼을 미룬다? 저는 그런 생각 절대 안 해요. 항상 어떤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죠. 저는 연애와 결혼은 같다고 봐요. 연애 따로 결혼 따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요. 나이가 됐으니까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도 저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요. 물론 저희 엄마야 매일 결혼하라고 그래요. 아우, 미치겠어요. 그놈의 손주 손주…"
미대 진학을 꿈꾸다 연기의 길을 선택한 그는 그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프란시스 베이컨 등 미술 거장들의 이름이 잇달아 튀어나왔다. 앞으로 가고자 하는 연기의 길도 미술가의 삶에 빗대 언급할 정도였다.
"알렉스 카츠라는 아주 잘 나가는 화가가 있어요. 그에게 누군가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무엇을 타고 나야 하냐'고 물었어요. 답은 '성실성'이었어요. 카츠는 예순을 넘긴 사람인데 아침 일찍 스튜디오에 나와 종일 그림만 그리다 밤 10시 넘어 집에 간대요. 톱 클래스 화가도 그렇게 사는데 저 같은 연기자는 오죽하겠어요. 연습도 많이 하고 자꾸 배워가면서 정말 직업인으로 살아야죠."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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