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5년간 복역했던 살인범이 재심을 통해 36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춘천지법 제2형사부(부장 정성태)는 28일 춘천에서 경찰간부의 초등학생 딸(당시 9세)을 성폭행한 뒤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5년 간 복역했던 정원섭(74ㆍ당시 38세)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재심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가 지난해 12월 재심권고 결정을 내린 데 따른 것으로 간첩 조작 등 시국관련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경우는 수 차례 있었으나, 일반 형사사건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재판부는 "당시 수사 경찰관들이 정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폭행, 협박 내지 가혹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며 "수사기관이 제출한 증거는 적법 절차에 반하는 중대한 하자가 있어 증거 능력이 없거나 절차적 하자 등으로 증명력이 부족한 만큼 정씨에 대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특히 "긴 시간 동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법원의 문을 두드린 정씨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댔던 법원마저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했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사과했다.
이날 법정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자 정씨는 굵은 눈물을 흘렸으며, 방청석에서는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씨는 1972년 9월27일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초등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자 같은 해 8월과 11월 서울고법과 대법원에 각각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당시 이 사건은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사건'으로 불리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후 15년 간 복역한 뒤 87년 모범수로 가석방된 정씨는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하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99년 11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1년 10월 다시 기각됐다.
정씨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2005년 진실위에 자신의 결백을 호소, 2년여 만인 지난해 12월 재심권고 결정을 이끌어 냈다. 정씨는 변호인과 상의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 제기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춘천=곽영승 기자 yskwak@hk.co.kr
■ 출소 후 신학공부 해 목회활동 "고문한 경찰관 이젠 용서하고 싶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재심을 신청한지 10년, 확정판결을 받은 지 36년 만에 살인자라는 굴레를 벗은 정씨는 그 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듯 법정을 나서면서 연신 눈시울을 훔쳤다.
정씨는 '사람이 옳지 못한 일을 만들어 이름을 알리면 사람은 비록 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은 반드시 벌한다'는 <명심보감 천명편> 을 인용하면서 당시 수사과정에서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한 경찰관에 대한 고통을 털어놓았다. 명심보감>
하지만 정씨는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끌려가면서도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고 용서했던 것처럼 나도 이제는 고문 경찰관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법정에는 아내(68)와 아들(46), 손자 등 정씨의 일가족을 비롯해 사건의 변론을 맡은 임영화, 박찬운 변호사 등이 참석해 정씨와 감격의 순간을 함께 했다.
정씨는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왔다"면서 "사건 직후 불의의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음에도 모진 세월을 감내하며 나를 믿고 기다려준 아내가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출소 직후인 1988년 고향인 춘천을 등지고 전북에 내려가 신학공부에 매진한 끝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개척교회에서 목회일을 하고 있다.
춘천=곽영승 기자 yskwak@hk.co.kr
■ 형사보상금만 최대 8억원
정원섭(74)씨는 15년의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얼마나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국가는 형사재판이나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될 경우 구금일수에 따라 하루 5,000∼15만800원(무죄 확정연도 1일 최저임금의 5배 이내)의 형사보상금을 지급한다. 이에 따르면 정씨는 형사보상금만 최소 2,700여만원, 최대 8억2,000여만원을 받게 될 전망이다.
이와 별도로 정씨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한다면 배상액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도 있다.
법원 관계자는 그러나 "원고측이 구금생활에 따른 피해, 회복돼야 할 재산상 손해액 등을 얼마나 입증하느냐에 따라 배상액이 달라진다"면서 "지금으로선 배상액 수준을 가늠키 어렵다"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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