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가 넘쳐나고 있다. 네 남자가 일하는 수상한 케이크점에는 어떤 남자든 한눈에 빠져들게 만드는 마성의 게이가 있고(영화 '앤티크'), 버스에서 만난 두 소년은 서로에게 가슴을 뛰게 만들며 성 정체성을 깨닫는다(영화 '소년, 소년을 만나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10월 막을 내릴 때까지 대단한 흥행몰이를 했던 뮤지컬 '쓰릴 미'는 무대에 뜨거운 남자들의 사랑을 올렸고,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커피프린스 1호점'과 마찬가지로 남장 여자를 향한 남자의 설레임이 은근한 매력이다. 1998년 동성애 영화 '해피 투게더'가 1년이나 국내 심의에서 유예됐던 것을 떠올리면 세상이 변해도 한참 변했다.
이렇게 한국의 문화예술에서 범람하고 있는 동성애는 실제 현실사회에서의 동성애자들의 권리 신장을 반영한 것이며, 그들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없애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일부 동성애자들의 기대와 달리 지금의 동성애 바람은 여성들을 위한 '꽃미남 전략'이다. 한국의 게이 문화는 동성애자보다는 여성 관객을 노리고 있다.
단적으로 '앤티크' 상영관에서 남자 관객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예매관객 중 여성 점유율 86%. 사상 최고로 여성에게 쏠린 영화로 꼽힌다. 영화사 관계자는 "특이하게도 조조 관객이 많은데, 20~30대 주부들이 보러 온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앤티크'를 관람한 여성 관객의 속내는 대부분 "꽃미남을 보기 위해서"다. 여대생 강혜은(23)씨는 "동성애 영화인 줄 모르고 갔는데 잘 생긴 남자가 4명이나 나오니 눈요기도 되고 좋았다. 주변에 이 영화를 두번씩 본 친구들도 많다. 솔직히 배불뚝이 아저씨들의 동성애 영화였다면 보러 갔겠나"라고 말했다. 여대생 최나연(24)씨는 "동성애자에 대해 진지한 생각 없이, 여자들을 위해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주지훈, 김재욱, 최지호 등 맡은 역할의 개성이 뚜렷한 배우들에 대해 "골라 보는 재미가 있다"는 반응도 나온다.
동성애 관계의 두 남자가 출연하는 뮤지컬 '쓰릴 미'의 공연 막판 매진 행진도 객석의 90% 이상을 차지했던 여성 관객 덕분이었다. 두 배우의 키스 장면에서는 여성 관객들이 질러대는 비명소리로 공연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꽃미남 게이는 영화와 뮤지컬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20대 여성을 유혹하는 가장 손쉬운 전략이다. '앤티크'를 제작한 영화사 집의 허지희 마케팅팀장은 "출연배우들이 티켓 파워가 검증 안 된 신인들이고, 마케팅 면에서는 가장 앞서 극장에 나올 관객이 20대 여성이어서 일단 꽃미남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며 "2004년 강동원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늑대의 유혹'에 이어 '앤티크'가 꽃미남 신드롬을 재점화했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심지어 동성애자 감독(김조광수)이 만든 진지한 동성애 영화로 꼽히는 '소년, 소년을 만나다'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제작지원금을 대준 지원자 집단인 '소년단' 256명의 대다수가 여성(84%)으로 구성돼 있고 미소년 김혜성과 이현진의 매력으로 여성 관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반면 남성 관객들은 이런 문화현상에 뚜렷한 거부감을 보이는 등 현실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크다. '앤티크'는 '올 겨울 최고의 이성애 커플 브레이커'로 회자된다. 관객 중에는 동성애자도 있을 법하건만 겉으로 보기에는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박차고 나가거나, 좌불안석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성 관객들이 대부분이다. 레즈비언 영화를 찾아보기 드물다는 사실도 동성애의 인기는 어디까지나 여성 관객 유혹에 달려있음을 확인케 한다.
이처럼 게이 영화나 뮤지컬이 남자 관객을 포기한 작품으로 꼽히는 만큼, 개봉 예정인 유하 감독의 대작 영화 '쌍화점'은 조인성과 주진모의 동성애 장면이 포함돼 있으면서도 이를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절반의 관객만으로는 손익분기점을 달성할 수 없는 규모여서 섣부른 모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일단 동성애자를 밝게 그린다는 점에서 최근의 트렌드를 환영하는 편이다. 제작자들은 그저 얼마나 많은 여성이 지갑을 열 것이냐를 계산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 하필이면 왜 동성애? 사회 다원화에 상업주의 편승
여성들을 위한 것이라 해도 왜 하필 동성애일까?
우선 사회가 다원화하면서 음지의 영역에 있던 동성애가 주류 문화에 표출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성들의 경우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동성애자에 대해 너그러운 경향을 보이는데, 그 가운데에는 남자 동성애를 다룬 만화나 영화 등을 적극 소비하는 '동인녀 집단'이 자리잡고 있다. 또 다른 한편에는 동성애에는 관심 없고 그저 미소년을 보고 즐기려는 '누나들'이 있다.
분명 우리 사회는 동성애에 대해 서구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 경향은 수용, 동성애 코드가 창작의 한 동력이 되고 있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의 남장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억압된 동성애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선에서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뮤지컬 칼럼니스트 조용신씨는 "공연 제작 종사자의 절대 다수가 동성애자인 서구에서도 이성애자까지 폭넓은 관객을 아우르기 위해 동성애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 은밀하게 코드화해서 보고 즐기는 창작 기법이 오래 전부터 발전해 왔다"며 "남장 여자 코드가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자 최근에는 커밍아웃한 게이가 나오는 단계로 발전했으며, 앞으로는 게이들 사이의 치정 관계를 다루는 수준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꽃미남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누나들의 존재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과 맞물려 있다. 전문직 여성이 늘어나면서 결혼보다는 연애를 즐기고, 연상-연하 커플이 낯설지 않게 된 사회 풍경의 한 단면이다.
이런 여성들은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좋은 '섹스 앤 시티' 같은 미국드라마를 통해 동성애 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게이는 동성애자라기보다는 기호나 관심사가 비슷하고 친절한, 여자친구 같은 존재다.
동인녀 문화는 일본의 야오이 문화에 뿌리를 갖고 있다. 야오이는 남성 동성애 만화를 즐겨 보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 동인녀들은 동성애 작품에 열광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성애 코드를 투영해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이병헌과 정우성, HOT나 신화 등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을 남남 커플로 엮고 누가 더 잘 어울리는지를 따져보는 인터넷 사이트에서의 오락이 그러한 예다.
김희원기자
●동성애 영화 변천사
동성애를 주요 소재로 삼은 첫 충무로 영화라는 말을 듣는 1996년작 '내일로 흐르는 강'의 한 장면. 동거 중인 두 남자가 잠자리에 들기 전 입술에 붙인 주먹을 서로 비비며 진한 애정 표현을 나눈다.
당시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행동이었을까? 천만에. 극 전개상으로는 진한 키스를 나눠야 했지만 당시로는 언감생심, 관객들의 반감과 심의위원들의 깐깐한 눈을 피해가기 위한 고육책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대담하고 노골적이다"는 평과 함께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는 사회적 금기의 언저리에서 적당한 타협을 하며 표현의 영역을 넓혀왔다. 동성애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했던 시절, 영화계는 은유적인 방법을 발판 삼아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다.
1993년 보이시한 매력으로 인기를 끌던 박선영이 출연한 영화 '가슴 달린 남자'에는 남장 여자가 여자 동료와 남자의 야릇한 시선을 동시에 받는 내용이 담겨있다.
남자간의 사랑과 여자간의 연정을 남장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에둘러 표현했던 것. 하지만 남자 동료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화들짝 놀라 정신병원을 찾는 장면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당시 사회의 혐오나 경계심이 더 엿보였다.
1998년 개봉한 '찜'은 여장 남자를 통해 여성간 동성애의 가능성을 살짝 열어놓았다. 한 남자가 오래 전부터 짝사랑하던 여자 곁에 있고 싶어 여장을 하게 된다는 게 영화의 내용. 여장 남자 역은 당시 떠오르는 꽃미남이었던 안재욱이 맡았다.
21세기 들어서 충무로는 동성애를 적극 끌어안는다. 2002년 개봉한 '로드무비'가 그 신호탄이었다. 두 남자의 동성애가 극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이 영화는 동성애에 대한 충무로의 표현이 은유법에서 직유법으로 변했음을 선언했다.
2005년말 개봉한 '왕의 남자'는 예쁜 남자 신드롬을 일으키며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언급 내지 논란 수준에 그치던 동성애를 상업적 코드로 탈바꿈 시켰다.
'왕의 남자'로 동성애 소재 영화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무너지면서 남남상열지사에 대한 스크린 속 묘사는 더욱 대담해졌다. 커밍아웃한 감독과 제작자가 의기투합해 만든 '후회하지 않아'(2006)는 소재 차원의 동성애를 뛰어넘는 화끈한 베드신으로 본격적인 퀴어영화의 도래를 알렸다.
보수적 성향의 지상파 방송에서 동성애는 오랜 세월 금단의 영역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커녕, 실제 게이인 홍석천이나 여성적인 성향이 강한 이정섭 등은 시트콤 등에서 감초 역으로 소비됐다.
동성애가 문화상품의 주요한 코드로 떠오른 최근에야 여의도도 동성애에 눈길을 돌리고 있으나 관심의 표출 방식은 아직 은근할 수밖에 없다. '커피프린스 1호점'과 '바람의 화원'은 남장 여자라는 변형된 유형을 통해 동성애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드라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김희원 기자 hee@hk.co.kr
강유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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