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협지(情俠志)부터 시작해 학창시절 열심히 읽어대던 무협지 덕택에 한자를 읽는 실력이 늘기도 했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그 하나는 어른들이 다투며 '이런 대명천지에' 했던 말을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어설픈 한자 실력으로 이렇게 밝은 백주 대낮에라는 의미라고 짐짓 추측했기 때문이다.
한데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백유선씨가 대명천지의 정확한 의미를 적었는데 그것은 조선이 명나라 소속이라는 뜻이다.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국립공원의 화양동 계곡에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고 남겼는데 숭정은 북경의 경산공원에서 1644년 자살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고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 황제의 것이라는 의미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해준 명나라가 고마웠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양반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웠기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지 이백 년 넘어서도 여기저기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고 감사의 뜻을 남겼다. 그 와중에 청나라를 자극해서 병자호란을 자초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포로로 끌려가서도 당당하게 자기는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의 신하라고 이야기했다.
얼마 전 중국인 교수가 카이스트를 방문했는데 공주의 무령왕릉을 보고는 묻힌 사람이 혹시 장군 아니냐고 동행했던 한국인에게 물었다고 한다. 지석이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으로 시작하고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 말을 듣고 특히 의아했던 것은 중국 측에서 멋대로 벼슬이랍시고 하나 주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중국 역사책에 갈겨 적은 것이 아니라 이쪽 당사자는 영동대장군이라는 것을 챙겨서 무덤까지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청의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신라시대의 유물에는 최치원이 적었다는 유당신라국(有唐新羅國)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에는 대송고려국(大宋高麗國), 유송고려국(有宋高麗國)이나 대원고려국(大元高麗國), 유원고려국(有元高麗國)이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반란)의 첫 번째 이유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는 이소역대(以小逆大) 거부의 정신을 내세웠다. 그래서인지 화약을 발명한 고려의 최무선(崔茂宣)을 대기발령 상태로 만들고, 지금의 국방과학연구소나 항공우주연구원에 해당하는 화통도감도 없앴다.
요즘으로 치자면 한참 잘 진행되고 있던 장거리 미사일이나 핵무기 개발을 취소하는 격일 것이다. 얼마 전에 나온 한국영화 '신기전(神機箭)'에도 이에 관한 간단한 배경 이야기가 나왔음직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취임 직후에 미사일 사정거리를 제한하는 협정을 미국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한국계 정치학자 빅터 차(Victor Cha) 교수는 그의 책에서 한국인들은 지난 수 천 년 동안 중국에서 받았던 간섭이 잠시 뜸해졌다고 중국을 까먹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다시 초강대국이 된 중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한국인은 그때서야 그나마 태평양 건너 멀리 떨어져 있던 미국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 세계가 10년 이내에 중국의 국력이 세계 1위가 된다고 생각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이런 대명천지에 한국에서는 지하철 풍력발전과 물로 작동하는 영구기관이 정부의 표창을 받고 있다.
한상근 과학기술원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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