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우 이렇게 만나야 되나?" 임영웅씨가 만날 때마다 나한테 하는 말이다. 이건 아니잖아? 라는 뜻일 것이다. 나하고는 아주 친한 사이다. 옛날에는 매우 자주 만났는데 요즘엔 무슨 모임 같은 데에서 우연히 만나는 게 고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한달에 한번은 만날 수 있다. 신문사 문화부 출신들 중에서 나이가 좀 든 양반들이 만나는 모임이 있기 때문이다. '고철회'라는 모임인데 낡은 쇠 덩어리도 반드시 쓸모가 있다는 뜻으로, 동아일보 출신 호현찬 선배가 지은 이름이다. 임영웅씨도 이 모임의 당당한 회원이다. 왜냐하면 그는 60년대 초까지 조선일보의 문화부 기자를 했기 때문이다.
신문사에 있을 때부터 그는 연극을 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으니까 어디 가랴만, 그는 그런 쪽으로 끼가 충만했을 터이다. 그러다가 그 좋다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그는 방송국에 들어가서 라디오 드라마 연출을 하게 된다. 동아일보가 운영하던 동아방송이 그것이다. 60년대 초의 일이다. 이때는 TV가 없으니까 맨 날 즐기는 것이 각 방송국의 라디오 드라마다. 그리고 드라마를 아주 재미있게 잘 만들기도 했다. 임영웅씨는 그때 이미 스타 연출가로 떠오르게 된다. (이양반 이 기사를 보면 쑥스러워 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는 1966년에 대작을 맡게 된다. 아마도 이것이 그의 연극인생에서 큰 줄을 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대형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 의 연출을 맡은 것이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김종필씨가 문화예술 중흥을 위한 일환으로 '예그린'이란 단체를 창단했는데 그 단체가 한국적 뮤지컬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이때 단장이 박용구씨, 작품은 김영수씨의 원작이고, 기획은 역시 신문기자 출신 황운헌씨가 맡았고, 가장 중요한 음악 작곡과 편곡은 최창권씨가, 합창지휘는 나영수씨가 맡았다. 살짜기>
연출자 임영웅씨와 기획자 황운헌씨는 둘이 다 일에 대한 욕심이 하늘을 찔렀다. 뭐든지 최고로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니까 정말로 기록될만한 대작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이들의 욕심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역을 맡을 연기자를 선택할 때 정극을 하는 배우가 아닌 대중예술 쪽에서 찾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이가 패티김이다.
패티김이 <살짜기 옵서예> 의 주인공 애랑 역을 맡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은 후 그 반응은 실로 대단했다. 대체로 용기있는 결정이라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정비장 역에는 한술 더 떠서 후라이보이 곽규석씨를 캐스팅 했다. 임영웅씨가 아니면 못할 짓이다. 그러나 그도 약간 불안 했는지, 다른 조연급 출연자들은 연극 전공한 이들을 많이 기용했다. 살짜기>
임영웅씨는 연습시키는 데에 있어 지옥사자라는 말까지 듣는 연출자인데 나는 서울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드레스 리허설 때 황운헌, 임영웅씨 등과 함께 밤을 꼬박 새웠다. 그 양반들이야 맡은 책임이 있으니까 밤을 새워 마땅하지만 나는 무슨 청승으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밤중에 시장할 테니까 먹을 것 마실 것을 사들고 가면 좋아서 야호야호 하던 이가 연습만 시작되면 호랑이로 돌변하는 것을 보면서 '아하, 연극연출이라는 것이 저런 매력도 있구나'하고 느꼈다.
내가 몸담고 있던 한국일보 빌딩이 신축이 되었는데 그 건물 꼭대기에는 12층과 13층 일부를 터서 극장을 만들었다. 이 공연장에서 개관 기념으로 연극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작품선정을 하게 되었다. 당시 주간한국 편집 총책임자였고, 문화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김성우 부장이 임영웅씨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그러더니 두 양반이 서로 왔다갔다 하더니만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를 개관 기념공연 작품으로 선택 했다. 무대가 좁아서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은 어려움이 있으니 고목나무 한 그루 세워 놓고 4,5명이 출연하는 작품을 택한 것이란 게 임영웅씨의 말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국내에서 이 난삽한 작품을 초연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는 것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고도를>
김성옥과 함현진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다. 공연은 대성공을 했고, 연장공연까지 했다. 나는 이때 여기저기 따라 다니며 홍보하는데 일익을 담당 했다. 그리고 내가 마치 블라디미르가 된 것처럼 대사를 읊어대곤 했다. 운도 따랐다.
공연이 시작하면서 마침 원작자 사무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더욱 빛이 발했다. 베케트조차 "나도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을 때 임영웅씨는 고도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그려주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수없이 이 작품이 소개 되었을 테지만 "가장 정확하게 작가의 의도를 해??것이 임영웅의 고도다"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1990년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가서 공연을 했는데 그때는 이미 베케트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내가 연출한 고도를 사무엘 베케트가 생전에 보지 못한 일이다"라고 임영웅씨는 말하고 있다.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 , <산불> 등 많은 작품을 연출하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리며> 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말렸으나 고집스럽게 '산울림'이라는 소극장을 신촌에 세운 것과 같은 그의 배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도를> 산불> 엄마는>
참고로 <고도를 기다리며> , <위기의 여자> 등등 그가 연출한 작품들을 번역한 불문학자 오증자 여사는 그의 부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의 대부이고 1961년에 명문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세워 초대 교장을 맡았던 고(故) 임원식 선생이 그의 삼촌이다. 위기의> 고도를>
신문사를 그만두고 연극계로 뛰어 들어간 일, 국내 최초의 대형 창작 뮤지컬을 연출한 일, 아무도 모르던 <고도…> 를 찾아내서 소개한 일, 20여 년 간 적자 속에서도 소극장을 이끌고 가는 일, 한때 건강이 안 좋아서 고생했으면서도 찌렁찌렁 울리는 큰 목소리로 토론하는 것 등을 보며 나는 그에게서 독특한 배짱 같은 것을 느낀다. 고도…>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