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빠 죽겠는데 또 휴대폰이 운다. "기자님, 안녕하세요. 저는 OO의 누구에요. 다름이 아니라 '이러쿵저러쿵 주저리….'" 말허리를 확 자른다. "네네, 확인할게요." 전화를 끊으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다. 웬걸 벨이 다시 울린다. '이번엔 누구야? 아, 괴로워.'
경제부 기자라면 무릇 내질러봤을 본의 아닌 전화응대. 상대는 업계 용어로 '홍보대행업체' 직원들이다. 새삼 새로운 것도 없는데, 뭘 그리 알리고 싶은 게 많은지. 마감에 쫓기기라도 할라치면 짜증은 배가 된다. 그러다 문득 미안하고 감탄한다. '그들은 어떤 DNA를 가졌길래 갖은 구박에도 저리 친절하고 부지런할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몰랐다. '딸이 원하는 직업의 정체는 뭘까.' 그래서 허리춤을 잡고 말렸다. "대기업 사원이나 영어 교사가 되라." 딸은 도리어 부모를 첫 고객으로 삼고 '설득의 미학'으로 초대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딸은 꿈을 이뤘다. 인터넷의 직업분류엔 '예술인'이라고 당당히 클릭한다.
그러나 무시당하기 일쑤인 부탁전화와 서먹한 만남, 산더미 같은 문서작업이 드러나는 업무의 8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목을 죄고, 청춘의 꿈을 부풀린 대학 교수가 야속하지만 행여 부모에게 들킬 새라 힘든 내색도 못한다. 부모는 딸의 정체를 그저 짐작할 뿐이다.
상식으로 포장된 세간의 잘못부터 짚자. '널리(弘) 알리고 보도케 하는(報) 일을 대신하면' 보통 홍보대행이라고 부른다. 익숙하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손사래를 친다. 또박또박 꾹 눌러 PR이 맞단다. '공중(Public)과의 좋은 관계(Relations)를 위해 각종 매개(미디어 이벤트 캠페인 등)로 물꼬를 트고 이를 유지해 믿음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 거창하지만 자부심의 발로이자 교과서에 에누리없이 등장하는 정의인 만큼 수긍할 만하다.
PR회사 'IPR'의 권현선(32) 과장, 민호기(28) 대리, 공인희(25) 조소민(24) 사원도 홍보대행업체 직원이 아닌 PR인의 긍지로 충만하다. '대행'이 품은 허드레(청소대행, 이사대행 등) 이미지가 영 마땅치 않은지 "우리는 PR컨설턴트"라고 재차 강조한다.
어떤 기막힌 일을 하길래 그리 위풍당당할까. 요약하면 PR을 위임한 고객회사가 알리고 싶은 브랜드와 이벤트, 각종 사안을 보도(혹은 참고)자료로 작성해, 이를 미디어(기사나 프로그램)에 실리게 하는 일이다. 업체(혹은 기관이나 단체)→미디어→소비자(혹은 대중)를 잇는 징검다리인 셈.
말이 쉽지 설득과 부탁, 애걸의 파노라마다. 일면식도 없는 담당 기자나 PD, 작가를 만나는 일부터 난제다. "다짜고짜 화를 내거나"(민 대리) "바쁘다며 절대 만나주지 않거나"(공 사원) "아예 연락 두절인 기자"(조 사원)도 있다. 불가능은 없다, 관계를 위해선 무슨 수를 써도 만나야 한다.
어렵사리 성과를 달성해도 스포트라이트는 없다. 업체는 명성(미디어 노출)을, 기자는 이름(바이라인)을 얻지만 PR컨설턴트는 뒷처리를 맡는다. 업무는 쳇바퀴 돌 듯하고, 행여 기사가 잘못 나가기라도 하면 이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권 과장은 "고객회사가 PR을 광고로 착각해 애써 내보낸 기사를 인정치 않으면 막막하다"고 했다.
PR의 결과는 만방에 알리되 고된 과정은 소리소문 없이 처리해야 한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수사(修辭)가 딱 맞다. 본인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다. "고객으로부터 가공 전 원석을 받아 각종 아이디어로 깎고, 새롭게 창조한 유행으로 포장해 미디어에 넘겨주기 때문"(권)이란다. 그것도 "남들 몰래."
그러니 일반인들이 그들을 제대로 알 턱이 없다. 오죽하면 부모도, 남편도, 친구들도 틈만 나면 "도대체 무슨 일 하냐"고 묻고 또 물을까. 본인들은 설명에 지치고, 가족은 알쏭달쏭 애가 탄다. '광고회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업 홍보부서도 아니고,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업체도 아니니… 원.'
그래도 "치열하게 일하는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부모"(민) "야근에 치여도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대견하다는 남편"(권) "PR은 나뿐 아니라 다른 이(대중)들도 즐겁게 한다는 생각"(조) 덕분에 지치지 않는다.
사실 무지보다 더 서운한 건 대충 아는 인식 부족이다. 보조역할로 치부(기자)하거나, 업체 입맛에 맞는 광고대행으로 오해(고객회사)하면 힘이 빠진다. 세상은 몰라줘도 PR은 본디 고객사와 미디어의 조정자, 기획이든 단순 자료든 글을 쓰는 창작자, 정보를 평등하게 전하는 메신저, 더 나아가 세상을 살맛 나는 곳으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조 사원은 "작문능력과 사진감각, 기획력과 아이디어, 세상에 대한 관심까지 필요한 PR인은 예술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더딘 인식 탓에 현실은 누추하기만 하다. 당장 기자 만나기도 버겁고, 예산 따내기도 힘들다.
하지만 PR인은 누구나 'PR의 아버지', '여론을 만든 사람'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꿈꾼다. 그 이름이 아직은 저 높은 곳에 걸려있고, PR에 대한 인식은 낮은 곳에 임해있지만 포기할 수 없다.
"성가시다 타박하던 기자가 공들인 만남을 통해 소중한 동지가 되고"(권), "친절마인드를 발휘해 부모님께 잘하게 되고"(민), "광고도 안하고 오로지 PR만으로 시범 판매했던 제품이 정식 출시되고"(공), "누가 알아줄까 속상했는데, 고객과 소비자로부터 '덕분에 행복했다'는 메시지를 받고"(조) 등의 경험을 통해 보람과 힘을 얻는다. 가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한몫 한다는 짜릿함도 누린다.
미래가 있기에 웃음이 있다. 숱한 구박과 갖은 몰이해도 그들에겐 이상의 실현을 위한 양분일 뿐이다. 몸에 밴 예의와 친절로 다시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저는 PR컨설턴트 누구입니다." 이제 막 그들의 땀방울이 스민 정보가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조심스럽게.
■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PR인의 자기 PR
-아버지: 에드워드 버네이즈(1891~1995)-여성흡연을 여성인권과 접목한 '자유의 횃불행진'(1929), 과테말라 사회주의정권 붕괴 일조(1950년대), 미국인의 식생활 변화 주도 등
-업무: 고객의 명성 증진, 언론관계 및 대응, 기자회견 및 이벤트, 뉴스 모니터링ㆍ분석 등
-일상: 신문 정독→기사에 대한 감사전화→아이디어회의(트렌드 이슈 추적)→보도자료 작성 및 배포(확인전화 40~50통)→기자 미팅(하루 10명 만날 때도)→고객 영입을 위한 제안서 작성(2주소요)→마무리는 늘 야근→제안서 발표는 고작 15분→숨쉬는 순간마다 아이디어 찾기
-본질: 정직으로 관계를 맺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창조자, 행복을 파는 영업사원
-연인: 기자(동지이자 조력자)때문에 울고 웃는다, 서로 마음 열면 고마운 존재가 되기도
-짝사랑: 연락두절 기자, 절대 안 만나주는 기자, 열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기자
-특기: 기자 설득 및 비위 맞추기(?) "화내고 귀찮아 하는 기자도 일단 만나면 좋은 사람이더라."
-요령: 전화(기자님, 시간 좀 내주세요)→또 전화(점심 한끼만)→다시 전화(5분만)→계속 전화(예의 바르게)→무작정 찾아가기도(단 일면식 없는 기자에겐 활용 금물)
-난감: 마감 30분 전 자료요청, 기사가 잘못 나갈 때, 이유없이 구박 받을 때
-총알: 아이디어, 주제 선점, 작문 능력, 사진 감각, 친절마인드, 설득의 대화법
-행복: PR을 통해 남에게 도움을 주고 행복을 안겼을 때
-다짐: 전문적인 PR컨설턴트의 가치를 인정 받는 그날까지 당당히 일한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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