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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6> 군사정권 빗댄 '태' 크랭크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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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6> 군사정권 빗댄 '태' 크랭크 인

입력
2008.11.24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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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람들.’ 1985년, 국내외로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 가속화되자 영화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침내 국회에서 영화법이 개정됐다. 20개 영화사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던 허가제가 이제 누구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등록제로 개정된 것이었다. 나는 즉각 영화사를 설립하였다. 회사명도 나의 운명을 걸겠다는 뜻으로 내 이름을 넣어 <하명중 영화제작소> 라고 하였다. 1985년 5월에 설립한 이 회사가 한국영화사의 첫 독립영화사이다.

설립 후 2개월 만에 첫 작품을 크랭크인 하였다. 너무도 기다리던 일이라 하루도 지체할 수 없었다. 20년 동안 숱한 작품을 준비하였지만 현 사회에 필요한 영화가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우선 민중이 자유롭게 숨쉴 수 없게 하는 사회가 싫었다. 작품은 천승세 선생의 소설 ‘낙월도’로 결정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한민족사가 줄거리다. 전라도 남단 끝에 있는 작은 섬, 세 명의 선주가 섬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상황이 마치 전두환과 그의 일당이 국민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놓고 포악하게 짓밟는 현실과 유사하였다. 민중의 깃발이 될 영화가 필요했다.

소설 ‘낙월도’는 이미 정부로부터 반체제적 작품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일단 검열의 눈을 피하기 위해 영화 제목을 <태> 로 바꿨다. 천 선생은 영화를 만드는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낙월도는 실존하는 섬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상의 섬을 찾아 한국 남단의 모든 섬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서해남단 끝에 있는 ‘왕등도’를 찾았다.

부안에서 위도를 거쳐 2시간쯤 더 가자 작은 거북 모양의 섬 두 개가 나타났다. 위 아래로 쌍둥이같이 앉은 섬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안내자가 앞뒤로 붙은 두 섬 중 하나를 상왕등도, 다른 하나를 하왕등도라 부른다고 설명하였다. 두 섬 모두 선착장도 없었다. 상왕등도는 무인도였다. 서남단 끝, 하왕등도에는 중국에 대한 최전방 군 초소가 있었고 군인 3명이 24시간 경계를 하고 있었다. 주민은 5명이었고 모두 노인들이었다.

조선시대에 반란죄로 유배된 사람들의 후예였다. 다 쓰러져가는 작은 초등학교 분교 건물이 있었다. 한 때 주민이 100여명을 넘는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 둘 육지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휘어진 허리와 깊게 파인 주름으로 덮인 얼굴에서 나는 우리의 역사를 보고 있었다. ‘하왕등도’, 그 섬을 낙월도로 정하였다.

종교까지도 전두환 독재정권의 시녀가 된 상황을 그리기 위해 부패한 무속신앙을 영화 속에 넣기로 하였다.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 기능 보유자인 한국의 대표 무형 인간문화재 김금화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이 무속에 관한 모든 자문을 맡았고 무녀역에 그녀의 신딸인 강신무 ‘채희아’씨를 추천해 주었다. 미국 샌디에이고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그녀를 불러들였다. 주인공은 이혜숙씨와 마흥식씨를, 그 외 모든 배역은 신인공모로 선발하였다.

3개월간 합숙 촬영하는 조건이 따랐다. 촬영은 정일성 촬영감독으로 정하고 동시 녹음 촬영기를 대여하기 위해 그를 일본으로 보냈다. 당시 국내에는 동시녹음카메라가 1대 뿐이었는데 이 카메라 역시 정권과 가까운 J 감독이 차지하고 있었다. 연기자 35명, 스탭 27명으로 짜여진 ‘태 군단’이 화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촬영지가 결정된 지 만 2개월이 지나서였다. 외지 사람들을 보자 노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연기자, 스탭 가리지 않고 남녀로 나누어 학교 교실 두 개에 숙박하게 하였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곳에 길을 내고 초가집도 몇 채 지었다. 지독하게 뜨거웠던 그 해 여름. 태풍이 무섭게 몰아쳤다. 바다가 뒤집어지고 초가집 세트가 하늘 위로 날아갔다. 한 노인이 창밖으로 목을 빼고는 80평생에 이렇게 사나운 바람은 처음이라며 방밖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무서운 자연과 싸우면서도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해일과 바람 속의 사람을 찍었다. 무서운 바다 위에 돛단배를 타고 그 위에서 배우들은 ‘대동굿’을 하며 춤추고 노래하였다. ‘낙원_한국’을 묘사하고 싶었다. 죽음의 신은 몇 번이나 뜻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나타났지만 우리의 뜻을 갸륵하게 여겼는지 조용히 비켜가곤 했다.

75일간의 촬영을 마치고 배가 부안 땅에 도착하자 스탭, 연기자들은 살아 돌아왔다는 기쁨만으로도 행복해 하였다. 70 가까운 한 노배우는 6.25 전쟁 때도 이런 고생을 해 본 적이 없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껴안아 주었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와 ‘태 모임’을 결성하였다. 나는 영화 음악을 위해 독일에 있는 김영동씨를 급히 불렀다. 그는 영화 ‘땡볕’으로 세계적인 벨기에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영화음악상을 받아 독일에서 특별한 대우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영화법이 개정된 후 영화제작이 자유로워지자 당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의 요원들이 눈이 벌게서 충무로를 훑고 다녔다. 이것을 미리 안 나는 촬영지를 무인도로, 배우를 신인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당연히 사전 검열에 제출한 시나리오와 촬영 시나리오는 달랐다. 우선은 영화를 완성해 놓고 검열당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신속히 편집과 녹음을 마쳤다. 누구도 ‘민중의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한 영화를 만들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깃발을 들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12월 22일,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영화가 검열에 오르던 날이었다. 공연윤리위원회 사무실 앞, 밤 7시가 되도록 닫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후 4시면 검열회의가 끝나고 ‘잘라야 할’ 장면을 영사실로 가서 잘라낸 후 필름을 찾아갈 수 있었는데, 공기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저녁식사가 배달되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시계를 다시 보았다. 밤 10시가 지나고 있었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고 검열위원인 듯한 사람들이 무거운 얼굴로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빠져나가자 나는 안을 기웃거렸다. 코트를 걸친 한 신사가 내 앞을 지나다가 돌아서 다가왔다. “수고 많이 했소.” 그는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사라졌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이 무거운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무삭제 통과요.” 이어 그가 말했다. “결정한 후 위원장이 사표를 냈소.”

그 다음날 아침, <공연윤리위원회위원장_최창봉선생> 은 신변상 이유로 문공부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사전 검열과 전혀 다르게 만든 영화를 중앙정보부원과 보안사령부요원과 대립하며 무삭제 통과시키고 홀연히 자리에서 떠났던 것이다. 같은 시간, 나는 <태> 필름을 안고 김포공항을 탈출하고 있었다. 세상이 바뀐 어느 날, 우연한 장소에서 선생을 만났다. 나는 선생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도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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