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위기상담 전화입니다."
12일 오후 4시 서울 논현동 서울시광역보건센터(이하 광역센터). 자살예방 상담전화(1577-0199)를 받은 위기관리팀 정혜영(27)씨의 입매가 일순 팽팽해졌다. 남편이 농약을 마시려 한다는 40대 여성의 다급한 전화였다.
정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농약부터 치우라고 말했다. 상황이 좀 진정되자 정씨는 남자의 상태를 가늠하려 부인에게 위기분류척도(CTRSㆍCrisis Triage Rating Scale)에 따른 질문을 던졌다. "이전에도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습니까."(위험성) "돌봐줄 가족이나 친구가 있습니까."(지지체계) "도움을 잘 받아들이는 편인가요."(협조도)
항목별로 1~5점씩 합계 9점 이하면 경찰ㆍ구급대 출동 및 응급 입원을 요하는 '극도의 위기' 단계다. 남자는 11점으로, 12시간 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중간 위기' 상태. 부인은 남편이 오랜 외도로 가산을 탕진해 불화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정씨는 "남편과 곧장 병원에 다녀온 뒤 다시 통화하자"고 다독였다.
전화는 연신 울렸고, 일부 상담원은 인터넷 채팅 상담을 하느라 바빴다. 말 붙이기 미안할 정도였다.
전준희(37) 위기관리팀장은 "평소 800~900건 정도였던 상담건수가 지난 9월 1,000건을 넘은 데 이어, 10월엔 1,250건으로 사상 최고점을 찍었다"고 말했다. 2005년 광역센터 설립 이래 가장 바쁘다고 했다.
사회복지사ㆍ간호사 8명으로 구성된 위기관리팀은 자살 및 정신질환 상담에 응하고, 위급할 땐 현장에 출동해 자살을 막는 최전방 부서다.
최근 상담 폭증의 직접 요인은 최진실씨의 자살. 상담원 서영미(31)씨는 "이은주, 정다빈씨 자살 때는 하루이틀 상담이 폭주했는데 최씨 여파는 한달 넘게 계속됐다"며 "'최진실 보니 나도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유행 같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들을 자살로 떠미는 가장 큰 이유는 생활고와 가정불화다. 여기에 세대별로 절박한 문제가 겹치면서 위기가 고조된다. 전 팀장은 "20대는 연애, 30대는 직장 및 대인관계, 40대 이상은 경제적인 고민이 많다"고 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벼랑 끝 사연들이 저마다 절절하다. 가족과 별거 중인 40대 남자는 딸 결혼식에 다녀온 뒤 목을 매려 했다. 집 팔아 유학 보냈던 외동딸의 외면에 상심한 70대 홀어미는 잔뜩 취해 "죽겠다"고 소리쳤다.
이혼한 날 전화를 걸어 "아이도 시댁에 맡겼으니 홀가분하게 삶을 정리하겠다"고 말한 여성의 행방을 찾느라 상담원들이 애를 먹기도 했다.
오후 6시. 강서구 건강보건센터로부터 긴급 상황이 접수됐다. 50대 남성이 자기 집 유리창을 모조리 깨뜨리며 자해 소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 야간당직자들이 출동했다. 이구상(36)씨가 운전을 맡고, 한보라(26)씨는 관할 파출소와 구급대에 남자의 병원 호송을 요청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이들에게 가장 난감한 상담 사례를 물었다. 이씨는 "죽어버리겠다고 할 때"라고 답했다. 부랴부랴 소재를 파악해 쓰러져 있는 피상담인을 응급실로 옮긴 일도 여러 번이란다.
끝내 자살해 버린 이들도 있었다. "새벽에 출동했더니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며 돌려 보내더래요. 경찰처럼 강제집행권이 있는 게 아니니까 할 수 없이 돌아왔겠죠. 그러다 아침에 경찰 전화를 받은 거예요. 통화 내역 보고 전화한다며, 이 사람 자살 전에 무슨 얘기 나눴냐고…."
병원에 도착했다. 자해 소동을 벌인 남자는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 치고는 너무 말쑥했다. 병원 직원들은 돌발 상황을 막으려 그를 침대에 묶었다. 경찰 입회 하에 입원 수속을 밟던 이씨가 불쑥 말했다. "앞으로가 문제예요. 외환위기 때도 실제 자살 행진이 벌어진 건 몇 년 뒤부터였잖아요."
한씨는 "상담할 때마다 가족의 소중함을 여실히 깨닫는다"면서, 최근 센터를 찾은 30대 가장의 이야기를 전했다. 사채인 줄 모르고 사업 자금으로 억대의 카드빚을 냈다가 자살 유혹에 시달렸던 그는 상담원 설득대로 가족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뒤 든든한 후원 속에 재기의 길을 걷고 있다. 센터로 돌아가는 밤길이 제법 잘 뚫렸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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