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의 유명한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 비단결처럼 탐스러운 머리칼을 가진 아내와 물려받은 멋드러진 회중시계를 가진 남편. 하지만 아내의 머리칼을 빛내 줄 머리빗 하나 없고, 남편이 언제라도 시계를 꺼내 볼 수 있게 주머니와 시계를 연결해 주는 근사한 시계줄 하나 없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둘은 서로를 기쁘게 해 줄 선물을 궁리하다 아내는 머리칼을 잘라 팔아서 남편의 시계 줄을,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를 위한 고급 머리빗을 장만한다.
■ 감사의 오므라이스
오 헨리 소설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결혼. 내 것에 배우자의 것을 합치게 된다는 기대는 금물, 나 혼자 갖던 것을 두 사람이 나눠 가져야 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시작하는 것이 결혼.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이다. '덕 볼 생각' 말고, '줄 생각'만 하면 싸울 일 없는 것 아닌가? 물론 그런 마음을 상시 유지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날이 추워 지하철역에서 집 앞까지 택시를 탔다. 인상 좋고 흰 머리가 성성한 기사 분이 혼잣말을 하셨다. "내일이 김장인데 추워서 어쩌냐." 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기사님, 댁에서 김장 할 때 도와주세요?" 여쭈었더니 "아, 그럼 도와야지. 배추 씻고, 통 씻고 옮기는 것은 내가 해야지. 남자가 힘쓰는 것 밖에 해 줄 게 없지만 그거라도 해야지요" 하셨다. 이렇게 터진 이야기가 십여분간 즐거운 수다로 이어졌다.
"저도 결혼한 지 몇 년 되었지만, 우리 남편은 하나도 안 도와줘요. 기사님이 요즘 신랑들보다 더 생각이 신식이셔요." 이렇게 푸념을 늘어 놓으려는 찰나, "자꾸 뭐라 하나 보지. 신랑이 설거지 하나, 청소 하나 해 주면 엉성하더라도 그저 칭찬만 해 줘야 해. 그래야 남자가 신이 나지." 헉! 정곡을 찔렸다. 나는 남편이 모처럼 설거지를 도와 준다 해도 '내가 더 빨리 한다'는 이유로 사양한다.
청소기를 밀어준다고 하면, 아랫집 시끄러워 하니까 뉴스나 보라고 한다. 결국 문제는 내게 있었던가. 집에 거의 다 와서 내리려고 하니, 아저씨가 한 말씀 덧붙이신다. "즐겁게 살아요. 나도 젊었을 때에는 '이 많은 세월을 언제 다 사나' 했어. 그런데 몇십 년 함께 사는 게 금방이더라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므라이스 만들 준비를 한다. 낮부터 입맛 없다며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다던 그를 위해. 냉동 칸을 열어 보니 전에 남겨 둔 고기 끄트머리가 있다. 어차피 썰어 넣을 것이니 고기 모양은 상관없다.
냉장고에는 양파, 새송이 버섯, 계란. 얼른 압력솥에 밥을 올리고, 감자를 깎고 양파를 다진다. 아침에 끓인 콩나물 국물도 꺼낸다. 자, 프라이팬을 달구고 식용유와 버터 한 스푼을 동시에 넣는다. 여기에 다진 양파, 감자, 버섯을 볶다가 아무렇게나 썬 고기를 넣는다.
뜸을 잘 들인 밥을 두 공기 넣고, 이미 볶아 둔 야채와 고루 섞이게 뒤적이다가 육수 대용의 콩나물국을 토마토소스와 함께 밥에 더한다. 육수는 간을 맞추고, 토마토소스는 색을 낸다.
토마토와 양파, 대파, 허브를 끓여 졸이고 체에 걸러 만든 토마토소스가 없다면, 케첩이나 시판되는 스파게티 소스를 취향에 맞게 섞어 보자.
후추와 송송 썬 쪽파, 혹은 파슬리 가루를 솔솔 뿌리고, 호들호들하게 적당히 익힌 달걀을 밥 위에 쪼르륵 올린다. 신혼부부라면 노란 달걀 위에 케첩으로 하트를 그려도 좋겠지만, 쑥스러워서 패스.
■ 원조 오므라이스
일본 오사카에는 1925년부터 오므라이스 하나만 해 온 집이 있는데, 같은 맛을 아직도 먹을 수 있다. 주 메뉴는 오므라이스뿐이지만, 오므라이스의 종류가 많다. 새우, 닭, 돼지, 쇠고기로 각기 다른 맛을 낸 오므라이스를 먹을 수 있다.
이 집의 비법은 추측하건대 육수에 있다. 새우 오므라이스, 치킨 오므라이스, 소고기 오므라이스를 먹었을 때, 단지 씹히는 내용물이나 토마토소스의 농도가 다른 게 아니라, 밥 자체의 풍미가 다르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 때 아예 육수로 밥을 짓지 않나. 각 재료에 맞는 육수로 밥을 짓고, 그 밥을 볶는 게 아닌가 싶다. 집에서는 일일이 육수를 내어 밥을 짓고 볶고 하기가 번거로워서 나는 그냥 집에 있는 맑은 국 국물로 대신한다.
아무튼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 데이처럼 둘이서 오붓하게 보내고 싶은 날에 나는 열에 아홉, 고기 넣은 오므라이스를 만든다. 오므라이스에 꼬들꼬들 씹히는 무말랭이 장아찌나 매실 장아찌를 곁들이면 맛있다.
■ 산타클로스
사실 크리스마스나 명절이면 남편보다 엄마가 더 생각난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비해 입맛이 소박한 우리 엄마랑 크리스마스 이브에 드라마나 같이 보면서 고구마 쪄 먹고 싶다. 파주 적성에서 가져 온 유기농 노란 고구마라면 더 맛이 있겠고.
엄마들을 보면 성인(聖人)이 따로 없다. 엄마들은 그 자체로 산타클로스다. 어릴 적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 주었든, 아니었든 간에 엄마들은 우??낳는 순간부터 희생했으니까. 아빠의 엄마도, 내 남편의 엄마도, 나의 엄마도, 내 엄마의 엄마도 모두 산타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나를 낳아준 각자의 산타들이 있어 외로울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것이다.
벌써 며칠 후면 2008년의 마지막 달력만 한 장 남는다. 지금쯤 때 이른 '미리 크리스마스'를 엄마와 단 둘이 즐겨 보아도 재미있겠다. 엄마가 외로울 때 나는 들떠서 집 밖으로 떠돌던 수많은 연말을 보냈다. 올해는 제법 철이 든 연말을 지내리라 혼자 약속해 본다.
박재은ㆍ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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